My mother never forgave my father

for killing himself

She locked his name in her deepest cabinet

and would not let him out,

though I could hear him thumping.

When I came down from the attic

with the pastel portrait in my hand

she ripped it into shreds

without a single word and slapped me hard.

In my sixty-fourth year

I can feel my cheek still burning.

스탠리 쿠니츠 (Stanley Kunitz 1905~2006)

내 어머니는 (어려운 시절에) 자살해버린

아버지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이름을 캐비닛 가장 깊은 곳에 가두고

한번도 얘기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들기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어느 날 다락방에서

파스텔로 그린 초상화를 들고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초상화를 찢어버리고 내 뺨을 갈기셨다

지금 내 나이 예순 넷

아직도 내 뺨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스탠리 쿠니츠가 태어나기 6주전 공원에서 자살한 유대인 아버지를 소재로 한 시. 그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일하며 아들을 키웠고, 쿠니츠는 정육점에서 일하며 하버드대 영문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이수하려 했을 때 하버드는 백인학생들이 유대인 선생에게서 배우기를 꺼린다는 이유로 쿠니츠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는 남편의 자살 이후 억척같이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헌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남편의 자살은 평생 대못을 박았지만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그의 모친. 삶이라는 엄청나게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세상을 건너가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예순네 살의 아들은 이 한 편의 시로 보답하고 있다. 스탠리 쿠니츠는 1987∼1989년에 뉴욕주 계관시인을 지냈다.

임순만 논설위원실장

* 영시 본문

My mother never forgave my father

for killing himself,

especially at such an awkward time

and in a public park,

that spring

when I was waiting to be born.

She locked his name

in her deepest cabinet

and would not let him out,

though I could hear him thumping.

When I came down from the attic

with the pastel portrait in my hand

of a long-lipped stranger

with a brave moustache

and deep brown level eyes,

she ripped it into shreds

without a single word

and slapped me hard.

In my sixty-fourth year

I can feel my cheek

still burning.

내가 태어나기 얼마 전

그토록 힘들었던 시절에

자살해버린 아버지를

어머니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셨다.

봄날 공원에서의 자살.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름을

캐비닛 가장 깊은 곳에 가두고

한번도 얘기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들기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어느 날 다락방에서

길쭉한 입과 멋진 콧수염

깊은 갈색의 흔들림 없는 눈을 가진

낯선 이의 초상화를 들고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 파스텔 초상화를 찢어버리고

내 뺨을 세차게 갈기셨다

지금 내 나이 예순넷

아직도 내 뺨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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