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김혜림] 여성들, 스스로 도울 때다 기사의 사진

지난 주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드라마를 보면서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딩동’ 10시가 넘은 시간에 누구? 아래층에 살다 10분 거리로 이사 간 이웃이었다. 대학 졸업반인 딸과 함께 새로 담근 김치를 갖고 왔다. 빛깔이 곱다. 직접 말린 고추(아, 그러니까 태양초다)를 넣어서란다.

엄마 옆에 앉아 배시시 웃는 딸내미. 취업 준비로 얼굴이 해쓱하다. 토익 점수도 좋고, 학점관리도 완벽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고…. 그만 하면 짱짱한 스펙이니 걱정할 필요 없겠다고 했다. 대답은 의외였다. 꼭 필요한 스펙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다나. 그게 뭘까? “요즘 남자가 최상의 스펙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 여자들은 수십 군데 원서를 내도 면접조차 보기 어렵단다.

30여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웬만한 회사 모집공고에는 ‘군필자’가 기본 자격요건으로 표시돼 있었다. ‘아줌마 때는 여자들은 원서조차 내지 못했다’는 얘기가 이 아이에게 위로가 될까? 아무리 노력해도 갖출 수 없는 스펙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에게 ‘그래도 최선을 다하라’며 등 두드려 보냈다.

정말 신입사원을 뽑는 데 성차별이 그렇게 심할까 싶어 다음날 자료를 찾아봤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6월과 올 2월 대학 졸업자 취업률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성은 62.7%, 여성은 56.1%다. 이 정도면 큰 차이는 아니다. 낙타 바늘 귀 들어갈 만큼 어렵다는 취업전선에 서 있는 아이들에겐 그 작은 차이마저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확실히 여성을 걸러내는 그물은 30여년 전에 비해 많이 성글어져 있다. 한데 아직도 성별을 가르는 그물을 치는 이유는 뭘까? 기업들이 여성을 걸러내는 그물코의 씨줄은 선입견, 날줄은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다. 시험성적 위주로 뽑는 분야에선 이미 여성 합격자수가 남성을 넘어선 지 꽤 됐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리더십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조사를 보면 이 짐작이 섣부른 것은 아니다. 이 연구원이 지난해 대기업 10개 회사 임직원 27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의 71%가 ‘일할 때 남성이 더 좋다’고 답했다. 여성 임원 관리자조차 절반 이상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좋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이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이기적이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한다’ ‘실천력이 부족하다’ ‘시야가 좁다’ ‘사적으로 코드 맞는 사람을 중시한다’ 등을 꼽고 있었다. 남자들은 또 ‘여성들은 잘 울고 싫은 기색을 잘 드러낸다’ ‘스트레스 내성이 약하다’ ‘동료로 행동하기보다 여자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궂은일을 하려 하지 않는 공주병이 있다’ 등을 들었다.

이런 지적에 억울한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데. ‘산전후 휴가나 육아휴직으로 공백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었다면 팔 걷어붙이고 정면 승부(?)를 펼쳐보기라도 할 텐데….

방법은 한 가지다. 그물코를 뚫고 입사한 여성들이 좀더 열심히 해서 그물을 던지려는 이들의 눈에 덮인 콩깍지를 벗겨내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불평등한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이는 그물의 존재조차 모를 테고, 어부는 밝은 눈에 콩깍지 따위는 끼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다음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나면 이렇게 얘기해줘야겠다. “열심히 공부해서 회사에 들어가라. 그리고 더 열심히 일해라. 네 자신과 여자 후배들을 위해서.”

김혜림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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