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빗길 트럭기사에게 배우시라 기사의 사진

“여야는 서로에게 거울이다. 위대한 선수는 훌륭한 경쟁상대가 만들어낸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서북쪽으로 60여㎞ 떨어진 곳, 베저강 옆으로 스톨제나우(Stolzenau/Weser)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그곳 처가에서 며칠 머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노버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십여 분이나 달렸을까, 이동하는 군부대에 막히고 말았다.

그 지역에 주둔 중이던 나토군이라고 했는데, 차량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낭패감으로 손에 땀이 배는 느낌이었지만 운전하는 처제의 표정은 심상했다. 그 여유에 대한 의문은 금방 풀렸다. 운전병들이 차례로 수신호를 해가며 자리를 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추월에 추월을 거듭함으로써 시간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신문 기사 하나가 20여 년 전 그날의 감동을 되살린다. 12일 일간지 인터넷 판의 머리기사다. 빗길을 나란히 달리던 옆 차선의 큰 트럭이 커브에서 끼어들려고 한다. 속도를 늦춰 대응하는 사이 트럭은 비켜나고 그 순간 전복된 차량이 눈앞에 닥친다. 속도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는 불문가지다.

이 장면을 정치의 길 위에 옮겨 놓을 방법은 없을까? 여야는 올 한해 내내 ‘국정원 대선개입’과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저마다 국민을 희망의 나라에 데려다 주겠다고 기염을 토하더니 목하 과거에로의 질주에 목숨이라도 건 표정들이다. 국민이 폭주운전에 제재를 가하고자 해도, 총선 대선은 지나갔고 앞으로 올 선거는 한참이나 남았다.

문재인 의원은 작년 12월 19일 밤 패배를 확인한 직후 ‘박근혜 후보’에게 축하를 보냈다. “국민들께서도 박 당선인을 많이 성원해주시길 바란다”는 말도 했다. 그 다음날에도 그는 “민주당이 정파와 정당을 넘어 국정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 또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거듭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바로 ‘상생공영의 정신’이라 믿어서 보낸 박수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문 의원과 민주당은 진작 과거로 가 버렸다.

대선 과정에 불법행위가 있었다면, 또 그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면 고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으로 그쳤어야 했다. 사생결단의 정쟁거리로 삼을 일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여야 모두 그렇게 많이 쏟아냈던 공약들은 언제 실천하려고!

민주당이 대선 후 지금까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여왔는지 새삼 따져 나열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지만 한번쯤이라도 빗길 트럭 운전기사의 그 ‘배려’를 보여준 적이 있는지 그건 좀 물어봐야 하겠다. 도대체 무얼 위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민주당의 성공’이라고 여겨 한사코 발을 걸고 있는 것인가?

경쟁상대는 자신의 존재이유다. 정당들은 서로에게 거울이고 스승이다. 위대한 선수는 훌륭한 경쟁자가 만들어 낸다. 우리가 대의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이상, 여야는 순치보거의 관계이기도 하다.

상대의 진로는 가로막고, 상대의 실패를 기대한다는 것은 곧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더욱이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 정부는 이미 야당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국회선진화법’ 체제 하에서는 여당과 마찬가지로 야당도 정부의 성패에 책임을 진다.

돌아보면 민주당은 패배를 설욕할 생각을 가졌던 것 같지가 않다. 세비를 비롯한 온갖 비용은 국민으로부터 받으면서, 민주당이 대선 후 열 달 동안 한 일이란 분풀이뿐이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는 것이 당의 위기 극복책이라고 여겼을까?

정치란 게 참여자 모두가 다투어 입을 들이미는 말구유일 수는 없다. 포부와 희망과 의욕이 샘처럼 넘치는 창출과 진취의 오케스트라여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지만 그 음들이 어우러져 장엄한 교향악이 되게 하는 게 진면목임을 여전히 믿고 있다.

정치적 하모니의 바탕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과 동료, 그리고 경쟁상대에 대한 배려다. 거창한 것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빗길 트럭운전기사의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이진곤(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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