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지현] 부엌의 권력 기사의 사진

부엌은 가족의 고단함과 허기를 달래주는 ‘이타의 샘’이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이타의 샘물을 퍼주며 자연스럽게 돌봄의 지도력을 배웠다. 자신보다 가족의 식성을 고려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부드러운 권력도 키웠다. 여성에게 부엌은 권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부엌은 혼자 남은 노년의 남편들에게 가장 힘든 곳이다. 아내가 곁에 있을 땐 부엌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아내가 부엌일을 할 수 없는 순간, 남자는 가파른 삶의 벼랑으로 몰린다.

일본 작가 사하시 게이죠의 ‘아버지의 부엌’은 아내의 죽음으로 혼자 살아가게 된 85세의 친정아버지를 홀로 서게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논픽션이다.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을 평생 해본 적이 없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저자는 어찌 보면 참으로 매정한 홀로서기 훈련을 시킨다. 이 소설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우리에게 삶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부엌 장악한 사람이 장수해

복지국가에 살아도 나이든 남자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201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60대 1인 거주자의 32.2%, 70대의 18.2%, 80세 이상의 13.7%가 남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1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 1인 가구 남자 어르신의 28.9%가 혼자 사는 데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가사 등 일상생활에 대한 처리를 꼽았다. 혼자된 남자들에겐 부엌은 극복해야 할 산이다.

특히 아내의 수발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던 남편일 경우 노년에 혼자되면 더더욱 힘들다. 영양이 부실해지고 자연히 건강도 약화되며 노화도 빠르다. 부엌일을 스스로 못하면 말년의 시간이 비루해진다는 것이다. 노년엔 부엌을 장악하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노년기에 부엌을 장악하지 못하면 부엌은 이타의 샘이 아니라 삶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혼자 밥해 먹는 은퇴 남편

젊은 시절 아내의 부엌일을 경원시했다면 남편에게 이타의 샘은 날카로운 권력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직장인 A씨는 결혼 후 30년간 줄곧 중소기업에서 한 달 300여만원을 벌어 아내와 두 자녀의 생계를 책임졌다. 지난해 자녀를 결혼시킨 후 정년퇴직했다.

‘이제 좀 편히 살면서 황혼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은퇴 후 한 달이 지날 때 “내일부터 밥은 혼자 차려 드세요”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엄포가 아니었다. 그날부터 아내는 거의 날마다 오전 10시만 되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A씨처럼 은퇴한 남편들이 가정으로 돌아와 가장 힘든 일이 ‘혼자 밥해 먹는 일’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집안일을 해온 아내들은 남편이 은퇴하면 기대하게 된다. ‘집안일을 도와 달라고 해야지. 가능하면 반씩 나눠서 하면 좋겠다’란 생각을 한다. 반면 아내의 기대와 달리 대부분의 남편들은 집안일을 거드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요즘 맞벌이하는 젊은 부부들은 이미 지혜롭게 가사와 양육을 분담하지만 이제 은퇴하기 시작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남편들에겐 여전히 어렵다. 요즘 요리하는 남성이 대세다. 결혼 전에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도 있고 은퇴 후 살아가는 데 필요해서 배우는 남자들도 있다.

85세의 고령에 혼자 살아야만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100세 시대’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이지현 종교기획부장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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