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성국] 화해의 정치는 번영의 씨앗 기사의 사진

지난 2000년 독일 하노버에서는 세계박람회(EXPO)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하노버 EXPO의 압권은 주최국 통일독일의 전시관이었다. 독일 16개 연방주에서는 각기 지역 특산물이나 자랑할 만한 최첨단 공산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자를란트(또는 자르)주의 전시관이었다. 자를란트는 면적이 제주도보다 조금 크고 인구 1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작은 주다. 자를란트가 EXPO를 맞아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농산품도 공산품도 아닌 한 권의 낡은 책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소중하게 전시된 그 책은 1956년 독일과 프랑스 간에 자르 지방의 독일 귀속에 관해 합의한 모두 8개 장과 97개 조항으로 구성된 조약문 원본이었다. 자를란트 땅은 18세기 이후로 독일과 프랑스 간 영토를 뺏고 뺏기는 역사를 반복한 분쟁지역이었다. 자를란트는 탄광과 함께 철광석을 생산하는 제철소가 있는, 경제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라 변변한 제철소가 없는 프랑스로서는 탐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양국 간에 이 조그마한 영토를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승전국이 된 프랑스는 다시 자르를 점령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내심 불안했다. 왜냐하면 1차대전 직후 베르사유 강화조약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라인란트의 비무장지대화, 자르 지방의 국제연맹 관할 등 독일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조건을 요구해 독일인들의 원한을 샀고 이것이 결국 히틀러에 의해 2차대전을 일으키게 한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후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자르는 독일 땅도, 프랑스 땅도 아닌 ‘보호령’ 또는 ‘특수지역’으로서 자치와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았다. 화폐도 1947년에 프랑스 프랑화와 연계된 ‘자르 프랑화’가 도입됨으로써 주민 대부분이 독일어를 쓰고 있었음에도 경제적으로 프랑스의 경제권에 편입되었다. 1949년 서독 정부가 출범한 이후 ‘자르 문제’는 독·불 간 외교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

양국은 둘 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견원지간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마치 1차대전 직후의 ‘데자뷰’를 보는 듯했다. 양국 간의 점증하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노력은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총리 로베르 슈망에 의해 이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1952년 발족해 독·불 간의 협력의 물꼬가 트이게 되면서 프랑스는 독일과의 신뢰 프로세스를 계속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이웃나라 독일과 진정한 화해 없이는 프랑스의 안보는 물론 정치, 경제 발전도 어렵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했던 정치 지도자들은 ‘자르 지방의 운명을 주민투표에 맡기자’는 것을 서독에 제안하게 된다. 자르 지방 주민 대부분은 혈통이나 언어상으로 독일인이기 때문에 주민투표에 맡긴다는 것은 독일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드디어 1955년 10월 23일, 자르 지방에서는 역사적인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주민의 67.7%가 자치체제로 남아있기보다는 서독에 편입되기를 원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이 결과에 따라 양국 외무장관은 1956년 10월 27일 룩셈부르크에서 자르 지방의 독일연방공화국 편입을 골자로 하는 조약에 서명했고, 조약이 정한 바에 따라 자를란트는 1957년 1월 1일부로 서독의 1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평화적 절차에 의한 자를란트의 독일 편입은 독·불 간 200년 앙숙관계를 화해시키는 역사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이후 양국은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연합, 유럽 단일화폐 도입 등 유럽 통합의 모든 과정을 손을 굳게 잡고 함께했으며, 유럽의 평화를 확고히 다지는 데 기여했다. 도무지 풀리기 어려워보였던 자르 문제는 역사의식이 있는 양국 정치 지도자들의 미래지향적인 양보와 결단에 의해 평화와 번영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악화되는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를 바라보면서 60년 전 독일과 프랑스 지도자들의 화해와 양보의 지혜가 그리워진다.

김성국 이화여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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