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인생은 빛과 그림자 빛나는 곳에만 살았으니 그림자도 있어야지” 기사의 사진

변양균 前 청와대 정책실장

지난달 일간지 사회면에 ‘변양균씨 1만원 소송 패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부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항소심에서도 졌다는 내용이었다. 1만원 소송도 눈길을 끌었지만 2007년 ‘신정아 사건’ 후 잘나가는 엘리트 관료에서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그 사건에 대해 묻지도 쓰지도 않으면 응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변양균(64)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해 초 발간한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 서문에서 “근거 없는 소설이 난무할 때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고 이해해준 사람은 대통령과 아내였다”고 썼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내 남편에게) 야단칠 일을 가지고 국가가 왜 나서서 야단인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그의 아내 말대로 그의 죄에 비해 너무 큰 형벌을 내린 건 아닐까.

당시 검찰은 신정아씨의 동국대 조교수 채용과 관련한 뇌물수수, 광주비엔날레 행사의 업무방해, 김석원 전 회장으로부터 3억원을 받았다는 특가법상의 알선수재, 흥덕사와 보광사에 특별교부금 12억원 배정과 관련한 직권남용 등 다섯 가지 혐의로 변 전 실장을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직권남용만 유죄로 인정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해 어느 방송사에 의해 가장 추락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으니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할 법한데 그는 초연했다. 만추(晩秋)의 정취가 가득한 경기도 과천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자택에서 지난 11일 그를 만났다.

-한 번의 사건으로 유능한 관료에서 추락했다. 검찰과 마녀사냥식 보도를 하는 언론에 대한 원망이 컸을 것 같은데.

“검찰과 언론은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를 감시하고 보호할 중추기관이다. 이걸 다 매도하면 안 된다. 일부 정치검사와 정치언론인이 문제다. 내 사건을 주도적으로 보도했던 4명의 언론인이 모두 공천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 목적이 거기 있었던 거다.”

6개월간 수감생활까지 했는데 세상에 대한 섭섭함이 있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는 갑자기 일어나 그림 하나를 보여줬다.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지난여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갔을 때 갤러리 앞을 지나다 보고 사왔단다. LA의 한 빌딩 앞 계단을 오르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엇갈리는 모습을 그린 거였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 쪽엔 빛이 비치고 내려가는 사람 쪽엔 그늘이 졌다. 그가 붙인 그림 제목은 ‘빛과 그림자’.

“인생은 다 빛과 그림자가 있는데 관료로서 최정상까지 올랐으니 내 능력에 비해 너무 빛나는 곳에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일부 그림자도 있어야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 그림을 본 순간 내 인생을 표현한 것 같아 너무 마음에 들었다.”

-2009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김석원 전 회장 부부를 상대로 3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1심에서 패했다. 1만원으로 소송 금액을 낮춰 항소했지만 얼마 전 항소심도 패했는데 상고심까지 갈 건지.

“상고심까지 갈 생각은 없다. 고소당한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이미 무죄판결 받았는데 뭘 또 그러냐고 할 수도 있다. 위증은 죄 없는 사람을 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위증조차도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 말씀인데 하물며 그는 사회지도층이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신작로를 뚫는데 자갈 하나 보태는 심정으로 소송을 냈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자본, 즉 규칙과 신뢰 수준이 아프리카의 시시한 국가보다도 못한, 거의 세계 100위권인데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과 ‘어떤 경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어떤 얘기들을 하고 싶었나.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은 노무현정부 시대 경제가 엉망이었다는 비판이 많자 경제정책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주변에서, 특히 친노 쪽에서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았다. 참여정부의 경제철학이 무엇일까를 적으려 하니 엄청 어려웠다. ‘어떤 경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는 영화를 갖고 우리나라 상황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지금은 치열한 경쟁밖에 없는 사회가 돼 버렸는데 우리가 선진경제, 행복경제로 나아가려면 사회규범과 신뢰, 규칙 등 사회적 자본이 축적돼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현 정부는 과다한 복지공약을 내걸었다가 후퇴시켜 역풍을 맞고 있다. 복지 확대도 중요하지만 재정 건전성도 지켜야 하고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

“우리나라가 빈곤과 양극화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정부가 개선시키는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4분의 1 정도다. 복지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국가를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지 목표와 운영 방안이 먼저 서야 한다. 재정이라는 것은 국가목표에 맞춰 조정하는 것이지 재정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적자재정은 물론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 국가목표다. 재정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국가채무가 너무 많으면 세금을 올려야 한다. 복지를 할 때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거다. 복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는 게 포퓰리즘이다. 경제예산보다 복지예산이 훨씬 더 정밀한 타당성을 거쳐야 한다. 복지를 정치구호화시키는 것은 포퓰리즘보다 더 나쁘다. 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 하는 것은 굉장히 난센스다. 이익단체와 결합하고 표 계산해서 나오는 복지는 안 된다.”

-3분기 경제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로 7분기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요즘 경기 상황이 정말 좋아지고 있다고 보는지.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고,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다 보니 성장이 필요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장 자체는 굉장히 중요하다. 미국 요세미티 공원의 3000년 된 세콰이어 나무도 성장을 멈추면 죽는다. 국가도 성장을 멈추는 순간 죽는다. 이 정도 성장률 갖고는 안 된다. 앞으로 2020년, 2030년 일본이라도 따라가려면 지금 성장률로는 어림도 없다.”

-정부가 어떤 일들을 해야 하나.

“경제운용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저성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동안 낙수효과(대기업·부유층의 투자·소비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로 이어져 경제가 좋아진다는 이론)만 노리는 성장으로 갔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이 그래서 저성장 구조에 빠진 거다. 분수효과(저소득층의 소비 증대가 경기를 부양한다는 이론)가 일어나는 성장 패턴으로 가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대외의존도가 아주 높은 구조인데 이를 당장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기업들의 국제경쟁력 향상이 굉장히 중요하다. 실업보장과 교육보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주고 경제구조가 변하도록 해야 한다.”

-검찰이 지난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등과 관련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폐기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여야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마디로 나라 수준이 너무 낮다. 외국 사람들한테 정말 부끄럽다. 대화록을 밝혀야 한다, 안 밝혀야 한다 떠드는 것 자체가 나라의 수준을 드러낸다. 선언문이 문제지 물밑에서 협상하면서 뭐라고 한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우리나라를 저신뢰 국가로 분류해 놓았는데 기분은 나쁘지만 맞는 말이다.”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 가는데도 정치권은 당장 급한 민생 현안이나 내년 예산안을 팽개쳐두고 정쟁만 하고 있다. 야당은 대선불복이 아니라지만 국민들 눈에는 발목 잡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야당이나 진보진영에 하고 싶은 말은.

“야당이 저렇게 해서는 희망이 없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작년 초 ‘포린어페어스’에 발표한 ‘역사의 미래’란 논문에서 좌파의 실종이라고 했다. 중산층 쇠퇴는 보수의 위기이지만 좌파는 아예 의제 설정에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좌파와 우파의 아이디어를 종합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나는 양극화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고 본다. 두 번째는 애국 프레임의 선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긴 하지만 군사독재국가가 아니지 않느냐. 군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처럼 군을 존중해야 한다. 진보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이 삭발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정치군인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40대, 50대는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못한 데 대한 마음의 빚이 있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었지만 이제는 빚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데 진보세력은 계속 빚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으니 굉장히 착각하고 있는 거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이 지났다. 어떻게 평가하며 정부와 여당에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은 박정희와 노무현 정도다. 내가 뽑는 최고의 지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런 지도자는 수십 년 만에 한번 나올 정도이고 대부분은 훌륭한 관리자 역할만 하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와 규칙을 많이 얘기하는데 우리 사회 문제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좋다. 박 대통령의 골든타임은 내년 6월 지방선거 끝나고 1년반 정도인데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양극화 해소 등을 위해 초석을 놓았으면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지정책은 우파 정부가 해왔다. 이런 사실들을 인식해 복지정책을 펴갔으면 한다.”

2007년 ‘정신적 죽음’을 당한 그는 지난해 ‘육체적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지난해 3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2011년 전립선암에 걸렸을 때는 좋은 병원들을 찾아다니며 살고 싶어 발버둥쳤다. 하지만 췌장암을 선고받은 뒤에는 생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고 아예 체념했다. ‘그래 죽지 뭐, 지금 여기서 이렇게도 살았는데 다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한번 열심히 살아보지 뭐’ 하는 심정이었단다. 췌장의 40%를 잘라냈는데 오진이었다. 수술 부작용으로 죽을 뻔한 고비도 넘겼다.

그는 요즘 ‘나의 인생, 빛과 그림자’란 가제로 책을 쓰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얘기하고, 그림자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고 빛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에게 죽음은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소갈 린포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티벳의 책’에서처럼 ‘아침저녁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양균은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기획예산처를 거치며 경제개발, 정부 예산, 국가기획 분야에서 30년을 일한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다. 참여정부에서 기획예산처 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 참모이자 ‘비전 2030’ 등 복지국가 비전을 설계했다.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보기 드물게 진보의 철학을 지닌 유능한 경제관료”라는 평을 들었다. 미술과 영화 등에 조예가 깊고 감수성이 넘치는 ‘신사’다.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그는 학창시절 시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화가를 꿈꿨다. 지난여름 ‘미들클래스소사이어티’란 사회적 협동조합을 설립해 중산층 행동강령 연구와 비즈니스를 병행하고 있다. 조각품을 만들고 싶어 목공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

△1949년 경남 통영 출생 △1973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경제학 석사, 서강대 경제학 박사 △1973년 제14회 행시 합격 △1977∼99년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재정경제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국제협력관 △2002∼2006년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차관·장관 △2006∼2007년 청와대 정책실장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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