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노사단체는 과연 대표성이 있는가 기사의 사진

“대표성 없는 양 노총 대신 노동회의소 만들거나 산별체제 전환 검토 필요하다”

수년 전 노동 문제를 취재할 때 민주노총 A정책연구원장으로부터 조직 내부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1년 예산 가운데 인건비 등 운영비, 지역본부 교부금 등을 제외하면 사업비로 남는 게 20% 남짓이라고 했다. 사업비는 조직 확대, 정책연구 및 교육·선전에 대부분 사용되는데, 정책연구원에 책정된 예산은 다른 집회나 행사비용으로 미리 전용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1년에 한 권 나온 연구보고서를 건네면서 그것마저 집필자들에게 원고료를 당장 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한 뒤 겨우 완성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한국의 노조들은 상급단체로 올라갈수록 가난하다. 현대자동차 등 일부 업종 대기업 노조와 금융, 금속, 전력 등 산별연맹은 조합비가 풍성하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최상급 전국단위 노조는 돈가뭄을 겪는다. 조합비 가운데 상급단체에 떼어 주는 연맹 의무금 자체가 적은 데다 조합원 가운데 의무금을 내는 비율인 징수율도 낮기 때문이다. 돈 문제를 비공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양 노총의 의무금 징수율은 50∼70%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노조 전임자 타임오프제 시행 이후 단위노조들이 정원 외 전임자에 대한 급여 지급을 위해 조합원 수를 줄여 보고하는 바람에 양 노총의 수입은 대폭 줄었다고 한다. 양극화는 노조 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노조 상급단체는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화하고,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게 주요 역할이다. 그렇지만 한때 20%에 육박하던 노조 조직률은 지금 반토막이 났다. 민주노총은 1998년 국가부도 위기에서 노사정 합의에 한 차례 참여했지만 즉각 합의를 백지화한 이래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하고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계파다툼 탓에 주요 현안에 대해 수개월씩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대의원대회는 몸싸움과 폭력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노사관계 전문 사용자 단체인 한국경총도 마찬가지다. 경총은 지난 십수년간 산업계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반노동적인 의견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왔다. 일본 게이단렌이 때로는 기업들 입맛에 쓴 정책이라도 방향이 옳다면 회원사들을 설득해 이끌고 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대·기아차는 기업단위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노동관계법 개정에 대한 경총의 경직된 태도와 집요한 로비에 불만을 품고 탈퇴했던 적도 있다. 노동법 전공의 한 교수는 “민주노총이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조직인줄 알았는데 경총이 더하더라”고 말했다. 경총과 전경련에 4대 그룹의 노무담당 임원과 중견 사원들을 교대로 파견해 이들 경제단체의 독단을 견제하고, 상호 간 전문성을 더 높일 필요가 있다.

양극화와 근로빈곤, 낮은 출산율과 낮은 고용률의 악순환, 저성장 등 실타래처럼 얽힌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정 간 대타협은 불가피하다. 노사정위원회는 지난 8월 초 본의원회 위원 수를 10명에서 19명으로 늘렸다. 보건복지부 장관, 청년과 여성계, 중소기업과 중견기업 각 1명, 학계와 시민대표 4명 등 총 9명이 추가됐다. 그러나 이로써 노와 사의 대표성이 강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자 등의 근로빈곤층이 과거에 비해 급증했음을 감안하면 전체 임금근로자의 4.5%와 3.5%만을 대표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노동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대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정규직과 미조직 노동자 대표를 별도로 참여시키거나 그들을 포괄하는 노동계 대표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즉 상공회의소의 노동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회의소를 정부가 법제화함으로써 모든 임금노동자에게 가입하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산별노조 체제로의 전환을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양 노총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이다. 노동회의소 설립이나 산별체제 강제는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대 군사정부가 기업별 노조를 강제했던 것이 정당화됐음을 감안해볼 필요도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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