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성국] 케네디와 집단사고 기사의 사진

지난 22일은 케네디 대통령이 서거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앞장서는 등 케네디 추모 열기가 뜨겁다. 케네디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수도 워싱턴의 알링턴 묘지에는 추운 날씨에도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도 가본 적이 있는 케네디의 무덤 앞에는 조그만 화로에서 365일 밤낮으로 항상 불이 타오르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3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962년 10월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행한 의로운 결단이 케네디를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 교수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 현상으로 인해 집단이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집단구성원의 응집력이 높고, 의사결정에 있어서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크고, 속히 결정을 하여야 하는 위기상황이 닥치면 집단 내부에서 소수의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실세들의 의견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자 하는 압력이 커지게 되어 집단사고가 발생한다고 설명하였다. 그가 집단사고 연구를 하게 된 것은 케네디 행정부의 1961년 ‘피그만 침공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에는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세운 ‘매사추세츠 마피아’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친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을 맡고 있었고, 백악관 보좌관들은 대부분 하버드대 동창이거나 고향 친구들이었다. 중앙정보국(CIA)는 1959년 공산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미국의 골칫거리라고 판단하고 쿠바 난민들로 구성된 1400명의 병력을 쿠바의 피그만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대통령의 재가를 얻고자 하였다.

군사와 안보분야 비전문가들인 핵심각료들과 보좌관들은 카스트로 정부의 군사력을 얕잡아보고 쿠바군의 저항은 미약할 것이며 미군이 조금만 거들어주면 상륙작전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유일한 전문가인 안보보좌관 슐레진저는 대통령 주변 실세들이 침공 승인을 강하게 주장해 대세를 뒤집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반대의견을 강력히 개진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졌고 침공군은 피그만에 상륙했으나 대비하던 쿠바정부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대패하고 만다. 피그만 침공은 결국 1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200명가량이 포로로 붙잡히는 결과로 끝났고 미국의 위신은 추락했다.

이듬해 10월 미국은 더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소련의 지원 하에 쿠바에 미국을 겨냥하는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으며, 실전 배치가 임박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군부는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케네디는 피그만 사건의 실패를 교훈삼아 최고전문가 12명으로 구성된 ‘EX-COMM’이라는 팀을 출범시켰고 매일 회의를 열어 자문을 받았다.

미국의 코앞 쿠바에 미사일기지가 있다는 것은 미국의 안보를 영구적으로 위협하는 대재앙이라고 판단한 케네디는 전군에 쿠바 봉쇄령과 함께 데프콘2를 발령했다. 이와 함께 소련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쿠바로부터 미사일 시설 일체를 철거할 것과 쿠바를 향해 오고 있는 소련선박들을 즉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면 군사적인 행동에 돌입하겠다는,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온 세계는 제3차 대전 발발의 공포에 떨며 쿠바사태를 숨 죽인 채 보고 있었다. 케네디의 선언이 있은 지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쿠바 침공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요구를 수락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쿠바미사일 위기는 해소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비전문가 측근들을 배제시키고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면서 외로운 결단을 내린 것이 미국과 자유진영을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케네디 서거 50주년을 맞아 한국의 정치상황을 돌아보며 지도자의 의사결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김성국 이화여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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