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재신임 받으라는 걸까? 기사의 사진

“병영국가형 폭력집단을 지척에 두고 무장해제하자는 뜻은 아니겠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10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재신임 폭탄선언’을 했다. 취임한 지 7개월 보름이었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대한 SK비자금 수수의혹 사건 수사가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엔 그 방식으로 ‘국민투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4개월 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당 대표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게 ‘경제불안 북핵위기 사회혼란 등 3대 위기’의 해결을 요구한 다음, “이를 외면하면 재신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압박했다. 9월 29일에는 대통령의 탈당과 관련, 김영환 당시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재신임’을 언급했다.

기실 ‘재신임’의 원조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가 후에 번복하느라 고생깨나 했다. 반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것을 위기 돌파의 무기로 삼았다. 야당은 첫날에는 ‘옳다구나!’ 했다가 금방 이것이 야당에 대한 대반격임을 눈치챘다. 이때부터 야당들은 대통령이 채운 ‘재신임’ 코뚜레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됐다. ‘탄핵소추’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했지만, 그것이 되레 화를 키워 한나라, 민주 공히 멸문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개월째다. 참여정부 때 시작됐던 ‘임기 초 위기’는 박 대통령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특유의 검투사 기질로 이를 돌파해 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촛불과 함성, 그리고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자책했다”는 호소와 ‘사과’ 퍼포먼스로 위기를 힘겹게 넘겼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검투사 기질이나 쇼맨십을 갖지 못했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한마디로 정치적이지 못한 정치리더다. 이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보이는 대응은 아주 서투르다.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한다고 공격을 받는다.

민주당은 과거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재신임 압박’이나 ‘탄핵소추 강행’을 반면교사 삼아서 ‘대선불복’은 아니라고 짐짓 목소리를 높인다. 이를테면 야권의 역할분담이다. 하야 요구는 종교계, 시민사회 일각의 ‘반 박근혜 세력’에 맡기고 자신들은 박 대통령의 ‘시인’과 ‘반성’만을 바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반박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압박력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재선을 위한 선거가 아니었다. 아무리 여당의 후보라고 해도 대통령이 따로 있는데, 국정원 보훈처 군 사이버사령부 등을 자신의 선거 및 득표 운동에 동원하기는 불가능하다. 기관 차원의 조직적 선거개입이라는 것도 아직은 주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야권은 박 대통령을 ‘불법선거의 총책’ 쯤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이를 빌미삼아 국가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기관들을 해체해 버리기라도 할 기세다.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하고 끊임없이 이쪽을 위협하는 병영국가형의 폭력집단이 지척에 있는데! 폭약 더미 위에서 사는 처지인 이쪽의 식솔은 무려 5000만명이고…. 과욕은 고갈을, 과용은 파산을 낳는다. 민주주의도 예외일 수가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리더십은 충동적 검투사형, 박 대통령의 경우는 냉정한 결벽증형이다. 상반되는 리더십이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 박 대통령 또한 ‘재신임’을 결심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반대자들에게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자존을 지키고, 국가 및 사회의 안전과 안정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결심이 필요하다고 할 때, 거기에 ‘재신임 국민투표’가 포함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야권의 공격은 특위를 넘어 다시 특검으로, ‘불법 대선 시인과 사과’로, 필경엔 ‘퇴진’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반대자들은 “합법적 대통령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며, 거리에서 소리 지르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박근혜 시대’는 실패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상황반전의 묘수, 박 대통령은 그게 무엇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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