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K-패션시대 선도하는 디자이너 이상봉… “37세” 내 열정은 청춘에 고정 기사의 사진

창조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세계는 음악이나 문학, 회화 못지않은 미지의 성역이다. 특히 패션디자인은 파리나 뉴욕에서 보듯 산업의 한 분야로 기능하기 때문에 성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분야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려운 이 관문을 뚫은 이 시대의 대표 디자이너 이상봉은 이런 점에서 행운아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성공 이면사가 그렇게 도드라지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20대 청년시절에는 연극에 빠졌다가 방황의 시절을 보냈고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선 뒤 어느 한 순간에는 너무나 힘들어 나이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를 물어보면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37살이란다.

-나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패션디자이너가 된 뒤인 서른일곱 살 되던 해 너무나 힘이 들었다. 영감도 떠오르지 않고 일도 되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도록 하자. 그리고 남을 원망하지 말자. 그때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이를 잊어버리도록 하자. 그 이후 나는 내가 몇 살인지 모른다. 거짓말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도 나는 내가 몇 살인지 모른다. 언제 태어났는지 그 해는 알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어제 저녁에도 30대 친구들과 같이 보냈다. 나를 사랑하자고 다짐하니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미움도 사라졌다.”

-훈민정음, 무궁화 등 한국적인 독특한 소재로 관심을 모았는데 창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솔직히 예전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엄청 돌아다녔다. 여행을 무지하게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달라졌다. 존재하는 곳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전시회나 영화, 연주회 등을 많이 찾는다. 창조의 시작은 진지한 관심이 아닐까. 또 나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뒤집어 보면 상상력이 발동되는 것 같다.”

-20대에 연극을 했다고 들었는데.

“원래 대학 가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연극이 아주 좋았다. 난 사실 초·중·고 때 친구가 없었다.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이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연극은 상대방을 향해 소리 지르고 같이 뒹굴고…. 하여튼 연극 포스터 붙이는 것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첫 공연을 준비했는데 막 올리기 1주일 전 도망갔다. 뒷감당이 안돼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로서는 연극은 일종의 낭만이요 사치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연극 무대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너무 또렷해 죽을 각오로 패션 세계에서 버텨왔다고 털어놨다. 패션 또한 연극만큼이나 변화무쌍하고 도전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디자인 공부는 어디서 했나.

“남들은 내가 어디서 디자인을 공부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힘든 시절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남산에 있는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이다. 거기서 2년 공부했다. 당시 교수진이 쟁쟁했다. 밤새도록 공부했다. 사실은 공부한 뒤 수선집이나 하나 차리려고 그곳을 찾았는데….”

-한글 패션으로 유명세를 얻었는데, 뒷얘기 좀.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한글 때문에 인연을 맺었다. 그녀가 한글을 무척 좋아했다. 한글로 한복을 디자인한 뒤 가구와도 접목시키고 한글과 단풍, 한글과 나비, 한글과 무궁화 등 시리즈를 냈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담뱃갑에다 한글을 디자인한 것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한 지인이 국민 디자이너로 불리는 사람이 몸에도 안 좋은 담배에 디자인해서 되느냐는 충고에 바로 재계약을 포기했다. 사실 담뱃갑 디자인은 국내용이 아니라 해외용이었다. 론칭 행사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했다. 수출용 담배에도 한글 디자인을 넣었는데 인기가 무척 좋아 국내에 유통된 것이다.”

-한글은 직접 쓰시는지.

“최근 작 아리랑 멋글씨(캘리그래피)는 내가 직접 썼지만 장사익과 임옥상 선생의 글씨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장 선생의 글씨는 물 같아서 너무나 부드럽고 임 선생의 글씨는 불과 같은 열정이 있다. 두 분의 글을 잘 조화시켜 작품에 반영한다. 두 분이 자필로 편지를 보내주신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특이하게 그는 디자인을 구상하면서도 스토리텔링을 강조했다. 패션에도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의 발로인 듯 여겨졌다. 실제로 이상봉은 2006년 파리에서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전에서 한글 패션을 처음 선보일 때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한글 티셔츠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는 “윤동주 김소월 김남주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붓글씨로 적어 원단을 만들 때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글씨를 무늬삼아 배열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지만 밤샘 작업을 통해 명작을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 한 일간지가 그의 한글 디자인을 소개할 정도였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패션 작가의 끈기와 집념의 결실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창조경제와 디자인이 닮은 점이 있다면.

“혁신이란 점에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창조경제도 그렇고 디자인도 그렇고 그 자리에 안주하면 안 된다. 패션디자인은 예술적인 측면이 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도 창조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지금 한류가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지만 패션의 한류를 한번 꿈꾸고 있다. 얼마 전 해외에 나가 보니 그들에게 서울은 희망이 돼 있더라. 우리가 만날 파리나 뉴욕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를 보여줄 때가 됐다. 말하자면 K-패션시대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높아진 우리 위상에 걸맞게 목표를 좀 더 높여야 한다. 내 옷도 중동이나 러시아에서 엄청 인기가 있다. 이제 우리도 세대의 간극을 극복하고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왔다.”

-지난해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재임하며 느낀 점은.

“작년에 여러 디자이너들이 떠맡기다시피 해 회장으로 취임했는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실 디자이너들이 워낙 개성이 강해 잘 뭉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정부에서 단체를 만들라고 여러 차례 독촉이 있었지만 우리들끼리 잘 모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20대부터 80대까지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잠시 경쟁을 멈추고 후배는 선배들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선배는 후배를 이해하면서 소통하는 장이 마련됐다. 사회와 호흡해가면서 정부에 요구할 것은 하고, 우리들도 다문화가정이나 소외된 이웃을 위해 할 일을 하면서 소통을 하려고 한다. 조만간 K-패션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려움이야 없지 않겠지만 회장을 맡고 난 뒤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화 전도사로서의 디자이너들의 사명감을 잊지 않도록 하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은 해외에 나가는 것보다 협회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 지금 계속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구가 많아서 고민이다. 패션이란 상업적으로도 성공해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모든 디자이너들이 자존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본다.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사회 모든 분야가 발전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로서 할 일을 열심히 찾아보겠다.”

지난 5일 서울 역삼동 그의 쇼룸에서 만났을 당시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전매특허인 민머리의 검은 뿔테에다 머리카락보다 훨씬 많은 수염을 기른 그는 긴 부츠를 신어 마치 30대 청년 같았다. 표정이 밝은 이유를 물어봤더니 방한 중이던 라가르드 총재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파리에서 제 패션쇼를 열었을 때 당시 산업통상부 장관이던 라가르드 총재가 두 시간이나 기다려 쇼를 다 보고 간 저의 오랜 팬”이라고 말했다. 전날 저녁 라가르드 총재의 숙소인 시내 호텔에서 만나 정담을 나눴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녀가 입은 옷도 자기 작품이란 말과 함께.

거기에다 라가르드 총재가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할 때 자기가 입은 옷이 이상봉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쇼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리랑의 오선지 바탕에 무궁화 디자인을 수놓은 개량형 한복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전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만난 사람=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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