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발레의 대중화·명품화 위해 단원들에 프로정신 심어줬죠” 기사의 사진

최연소 국립발레단장과 최장수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구현한 예술인…. 올해 말로 정든 국립발레단을 떠나는 최태지(54) 예술감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그는 한국 발레의 대중화, 명품화, 세계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권이 다섯 차례나 바뀌는 사이에 정동극장장을 포함해 15년 이상 예술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혈연·학연·지연이라고는 전혀 없는 재일동포 2세가 한국에서 성공한 것은 오로지 실력 덕분이었다. 어머니처럼 국립발레단원들을 대했지만 기량만을 보고 무대에 올렸다. 2000년 재단법인 이전에는 단장, 이후에는 예술감독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난 10일과 16일 국민일보에서 발레를 사랑한 최 예술감독을 만났다.

만난 사람=염성덕 논설위원

-발레를 하게 된 계기는.

“먼저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유치원 시절에 어머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영화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이나 비비안 리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 예뻤다. 세련된 여배우를 빼닮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나.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랬다. 어느 날 언니를 데리고 발레학원에 가는 어머니를 따라갔다. 학원에서 만난 발레 선생님이 여배우처럼 아름다웠다. ‘발레를 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를 시켜 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아홉 살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촉망받는 무용수였다.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넜는데.

“일본 문화청 국비장학생에 내정됐으나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재능을 아깝게 여긴 시마다 히로시 일본 발레협회 부회장이 한국행을 적극 권유했다. 그는 나중에 일본 국립발레단 초대 단장과 발레협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는 30년 동안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임성남(작고) 초대 국립발레단장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가.

“임 단장은 시마다 부회장의 애제자였다. 스승이 추천하니까 임 단장이 객원무용수로 발탁한 것 같다.”

-국립발레단원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88년 ‘왕자호동’에 낙랑공주 역으로 출연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명고를 찢기 전에 낙랑공주가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때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팔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마사지만 받고 공연을 계속했다.”

-딸 둘을 낳고 무대로 복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임신 전에는 47㎏으로 아주 날씬했는데, 첫딸을 가졌을 때 80㎏으로 불었다. 출산했는데도 3∼4㎏밖에 줄지 않았다. 평범한 주부로 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임 단장이 무대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식사량을 줄이고 호된 훈련에 돌입했다. 4∼5개월 만에 예전의 몸매를 회복했다. 무대에 복귀해 무용수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둘째딸을 임신했다. 그때도 80㎏이 넘었다.”

-그렇게 무대에 서고 싶었나.

“무대와 등질 줄 알았다. 서울 옥수동에 ‘최태지 발레 학원’까지 열었다. 그런데 임 단장이 찾아와 설득했다. 정말 망설였다. 무대에 복귀하면 후배들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배들 얼굴을 떠올리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임 단장이 세 번째로 찾아와 ‘복귀 명령’을 내렸다. 낯선 땅에서 고생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임 단장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다.”

-우리말에 서툴러 초반에 고생이 많았겠다.

“발레는 언어가 없는 예술 아닌가. 무용수로서 적응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국립발레단장이 된 뒤에는 언어 때문에 힘든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슨 뜻인가.

“만난 적도 없고 발레도 모르는 사람에게 발레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재정지원을 요청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해도 도움받기가 쉽지 않은데 더듬거렸으니 오죽했겠는가. 예산당국을 찾아가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할 때는 진땀을 흘렸다.”

-직원들과 함께 가지 그랬나.

“수석무용수들을 데리고 공무원들을 찾아갔다. 무대에 오른 것처럼 온몸으로 현장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때로는 읍소했다. 국립극장 산하 기관이었던 국립발레단이 2000년 재단법인이 되면서 단원들과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녔다.”

-미인계나 미남계를 쓴 셈인데, 효과가 있었나.

“(웃음) 효과 만점이었다. 국고 지원금이 2000년 20억9000만원이었는데, 올해 71억400만원으로 늘었다. 이 기간에 공연 수익도 6억6800만원에서 26억1800만원으로 급증했다. 그야말로 국립발레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총 12년간 예술감독을 지냈다.

“돌이켜보면 긴 기간이었다. 96년부터 2001년까지, 그리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발레단을 맡았다. 그동안 정권이 다섯 번,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만 10여명 교체됐다. 저를 믿고 따라준 단원과 스태프, 그리고 국립발레단을 사랑해준 관객, 조언을 아끼지 않은 선배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

“한 가지만 소개하겠다. 김영삼 대통령 때의 일이다. 김 대통령과 외국 정상과의 청와대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대부분 참석자들이 기사가 딸린 세단을 타고 청와대에 도착했는데, 나는 쏘나타를 직접 몰고 갔다. 만찬장으로 가야 하는데 청와대 직원이 주방으로 안내하더라. 만찬 준비요원으로 착각한 듯했다.”

-국립발레단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는데.

“연봉제를 단행하고 성과급을 차등 지급했다. 그 전에는 연공서열에 따라서 월급을 주었고, 공연 기여도와 관계없이 무대에 설 때마다 1인당 5만원씩 지급했다. 1등급인 수석무용수와 7등급인 코르드가 똑같이 5만원씩 받은 것이다. 외국에서 수석무용수를 초청하면 수백만원을 줬는데, 우리 수석무용수는 고작 5만원을 받았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개인 레슨을 하면 20만∼30만원은 받는 시절에 누가 주연으로 무대에 서려고 했겠는가. 노력하라고 다그치는 것보다는 제도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1회당 공연수당을 5만∼80만원으로 차별화했다. 공연 횟수가 2000년 58회에서 지난해 116회로 급증했다. 당연히 단원들의 처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단원들이 월급의 반 이상을 들여 구입하던 토슈즈를 발레단 예산으로 사줬다. 단원들이 몸 관리를 철저히 하고, 개인 레슨을 자제했다. 발레단원들이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것이다.”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데.

“국립발레단원들이 행복해야 공연을 보는 관객도 행복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단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공연 횟수를 크게 늘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준 것이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예술감독으로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나.

“발레의 대중화, 명품화, 세계화를 위해 주력했다. 작품과 음악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고 작품의 정수를 모아 소개하는 ‘해설이 있는 발레’, 문화 소외계층에게 공연을 보여주는 ‘찾아가는 발레’를 적극 추진했다. 티켓 가격을 낮춰 관객을 끌어모았고, 꿈나무를 키우기 위해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세계적 거장의 작품인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파트리스 바르의 ‘지젤’ 등을 국내에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폴란드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국립발레단으로서 문화외교에 앞장선 것이다. 특히 발레 근원지인 이탈리아 산카를로극장 무대에 창작발레 ‘왕자호동’을 올림으로써 국립발레단의 세계적인 수준을 널리 알렸다.”

-‘찾아가는 발레’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처음엔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어떻게 백화점에서 공연을 하느냐’ ‘발레가 슈퍼마켓에서 파는 잡화냐’라고 맹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리는 발레만 진정한 예술이라고 한정하지 않았다. 공연을 보면 관객이 발레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대 세트가 없어도, 공연 시설이 열악해도 관객들을 찾아다녔다. 이때에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주로 어디를 방문했는가.

“군부대, 서울경찰청, 법원, 초등학교, 백화점, 장애시설, 실버마을, 다문화가정 밀집 지역 등 발레를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무료로 공연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제주까지, 경북 울릉도에서 충남 태안까지 동서남북을 두루 다녔다. 2008년부터 지난달까지 무료 공연을 포함해 전국 130여곳에서 4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발레 대중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자평한다.”

-예술감독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발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공연을 보여주는 공익사업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연에 집중하는 장애아동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스타 무용수를 키운 비결은.

“모든 무용수들에게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 김주원 김지영 이원국 김용걸은 그런 기회를 발판 삼아 스스로 스타가 된 단원들이다. 그들은 재능이 뛰어나고 정신력이 강했다.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박세은,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도 국립발레단에서 외국으로 보낸 세계적인 스타들이다. 발굴해서 기회를 준 것이 스타 무용수를 키운 비결일 것이다.”

-영국 ‘오페라의 유령’이 TV에 방영되면서 뮤지컬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TV를 통해 발레를 홍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가.

“한 방송사가 공연 장면을 촬영해 방송하자고 제의했다. 로열티를 주지 않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런 조건으로 발레 공연이 방영된 적은 있다. 발레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발레 작품이 TV로 방영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적정한 로열티를 내고 방영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한다. 국립발레단 수준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출중하다.”

-국립발레단 후원자는 얼마나 되나.

“130여명쯤 된다. 신영증권, GS, 두산, 유니온스틸, 삼성, 현대카드, 메리츠화재, 하나금융그룹 등 대기업과 금융회사들도 후원자 대열에 합류했다.”

-18일부터 무대에 올리는 ‘호두까기 인형’이 마지막 무대인데.

“‘호두까기 인형’을 만들어 공연한 지 벌써 13년이 흘렀다. 어느 평론가는 차이콥스키 3대 발레 가운데 ‘호두까기 인형’이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에 동감한다. 이 작품을 끝으로 예술감독직을 내려놓는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가장 슬프다.’ 현재의 내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앞으로 발레학교를 세우는 일에 주력할 것인가.

“이제는 국가가 세계적인 예술인을 키우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가난하더라도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발레를 접할 기회를 주고 싶다. 지금처럼 사설 학원에서 발레를 배우게 하면 가난한 아이들은 역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언어가 없는 발레를 통해 다문화가정의 어린이들이 정체성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성공한 무용수들이 은퇴한 뒤 발레학교에서 교사나 안무가로 활동하는 길도 열릴 것이다.”

-강수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가 후임 예술감독을 맡게 됐는데.

“아주 특별한 무용수다. 0.01% 안에 드는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후임 예술감독과의 인연은.

“국내 공연에 초청한 적이 있다. 1997년 ‘노트르담의 꼽추’를 무대에 올릴 때 수석무용수로 초빙했다. 2000년에도 한국을 빛낸 스타 무용수 가운데 한 명으로 초청했다.”

-후임 예술감독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그는 외국의 발레 경험이 풍부하다. 애국심도 대단하다고 들었다. 독일에서 기량을 쌓은 만큼 국립발레단원들에게 새 옷을 입힐 것이라고 기대한다. 국립발레단이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우뚝 서도록 지도할 것으로 믿는다.”

최태지 예술감독은

△일본 교토 △일본 분카 가쿠인 불문학과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 무용수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국립발레단장 △정동극장장 △서울사이버대학 석좌교수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 수상 △옥관문화훈장 수훈 △파리 오페라발레단 승급 콩쿠르 심사위원 △국립발레단 예술감독(현)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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