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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염운옥] 착한 수퍼마켓

[글로벌 포커스-염운옥] 착한 수퍼마켓 기사의 사진

지난 9일 영국 사우스요크셔주 반즐리 인근 골드소프에 영국의 첫 ‘사회적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사회적 슈퍼마켓은 영국에는 처음이지만 유럽에는 낯설지 않다. 이미 프랑스에는 800여개, 오스트리아에 80개, 벨기에에 70개, 스위스에 23개가 있다. 이 슈퍼마켓은 영국의 사회적 기업 ‘커뮤니티숍’의 자회사로 수요예측에 실패해 과잉 생산되거나 포장 불량 등으로 시장에 판매되지 않은 재고품을 빈곤층에 최대 7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 슈퍼마켓 안에는 막스앤스펜서, 테스코, 모리슨, 오카도, 아스다 등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제품이 쌓여 있다. 웨이트로스와 세인즈버리도 교섭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상품 로고가 잘못된 위치에 찍힌 요구르트가 보이고, 2파운드20펜스짜리 빵은 20펜스에 팔린다.

제품에는 이상이 없지만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식료품과 생필품을 유료로 판매한다는 점에서 남은 음식이나 유통기한이 임박해 판매하기 힘든 식품 등을 무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푸드뱅크와는 차이가 있다. 사라 던웰 커뮤니티숍 대표는 진열된 모든 상품이 유통기간 내에 있고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팔릴 수 있지만 일반 슈퍼마켓에서 실제로 팔리지 않은 잉여생산품을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재화로 활용한다는 발상이다. 잉여생산품을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적 재화로 활용하는 방식은 제조 및 유통업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영국의 슈퍼마켓 체인인 아스다의 앤디 클라크 회장은 “생필품 가격을 낮추려는 계속된 투자에도 여전히 식량빈곤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며 “사회적 슈퍼마켓은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한 소매산업의 대응”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슈퍼마켓의 등장은 영국의 식량 빈곤 문제와 무관치 않다. 영국 최대의 푸드뱅크인 ‘트루셀 트러스트’의 이용자는 지난해보다 3배나 늘었고, 영양실조 진단을 받은 어린이 수는 2008∼2009년 3161명에서 2012∼2013년 5499명으로 증가했다. 사회적 슈퍼마켓은 회원제로 운영되며 골드소프 지역 빈곤 가정 500가구가 6개월간 시범 이용자로 선정됐다. 내년에는 영국 전역 20곳에 비슷한 슈퍼마켓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런던에서는 이스터 기간 오픈을 앞두고 있다. 골드소프 지역이 첫 시범케이스로 선정된 이유는 커뮤니티숍 창립자 존 머렌이 반즐리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이 폐탄광촌으로 빈곤이 심각한 지역이라는 이유가 컸다. 이곳의 아동 빈곤율은 27∼36%로 전국 평균인 17%보다 월등히 높다. 지난 4월 전 총리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 때 골드소프에서는 대처의 인형을 넣은 관을 불태우며 그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모의 화형식이 열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84년 대처의 광산업 민영화에 따른 탄광 폐쇄에 항의하는 광부 파업 때 제방이 무너져 14세와 15세 소년 둘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에는 두 소년의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대처 화형식은 이런 해묵은 분노의 표출이었다.

예수회 사제로서 오랫동안 빈민사목에 열정을 바쳤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장문의 경고문을 발표해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독재’로 통렬히 비판했다. 진은영 시인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라는 시에서 ‘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 세상, 영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빈자는 더욱 빈곤해지고, 일자리에서 쫓겨나지는 않으셨는지, 밤새 ‘안녕들 하십니까’ 물어야 한다.

가혹해진 자본주의 세상을 건너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사람의 온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저소득층에게 값싼 식량을 생색내며 제공한다는 비판, 사회적 슈퍼마켓 이용이 빈곤의 낙인이 된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당장 빵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반갑다. 골드소프의 슈퍼마켓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어쨌든 메리 크리스마스, 착한 슈퍼마켓.

염운옥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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