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 칼럼] ‘달보고 짖는 개’가 될망정 기사의 사진

“기자가 志士까지는 아니라 해도 공동체와 주위 사람들에게 책임감 못느껴서야”

세상에 개처럼 사람과 친하고 사람에게 충성스럽고 사랑받는 동물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개 같다’는 말은 지독한 욕이 됩니다. 게다가 요즘엔 무조건 ‘개’를 말 앞에 붙여서 최악의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기도 하지요. ‘개피봤다’든지 ‘개쩐다’든지.

하지만 저는 반평생을 ‘개’로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개에도 종류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파수견(把守犬)이란 게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파수를 보는, 즉 경계를 서는 개죠. 보통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로 공동체에 위험이 닥치거나 변고가 생길 때 그것을 감지하고 미리 경고해 주는 파수견의 역할을 꼽고는 하는데 저는 ‘언론인’으로서 나름대로 그 역할을 자임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사실 요즘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 올드 미디어 시대의 ‘파수견=기자’ 타령을 하기가 좀 민망하긴 합니다. 요즘 세태가 어떻습니까? 인터넷과 SNS가 온 세상을 뒤덮다 보니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고 이른바 논객을 포함한 자칭 타칭 언론인이 걷다 보면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언로(言路)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지고 넓게 개방돼 있는 현재 오히려 그럴수록 진정한, 고전적 의미의 기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근대화 시기 초창기 언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걸고 독자, 국민에게 무한 책임을 지는 ‘기자=지사(志士)’까지는 아니라 합시다. 그래도 공동체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저 하고 싶은 말만 내뱉거나 나아가 사실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 언필칭 ‘언론인’들은 걸러져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강산이 세 번도 넘게 바뀔 동안 제가 자화자찬한 만큼 파수견 역할을 정녕 충실히 수행했는지는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죠. 돌이켜 보면 독자들의 칭찬이나 격려 못지않게 욕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거워지는, 때로는 치기어린,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논리에 매몰된 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틀린 경고를 툭하면 남발하는 ‘양치기 소년’이었거나 남의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떠들거나 참견하는 ‘달보고 짖는 개’ 꼴이었던 거죠. 그런가 하면 거꾸로 누구처럼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글을 쓰기는커녕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경우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독자들의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남으로써 쏟아질 질책이 두려웠던 거죠.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글로 쓰지 못한 얘기지만 저는 제발이지 정당과 정치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남북통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통일은 떠든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북한에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통일은 지고(至高) 지선(至善)의 가치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남북이 왜 굳이 통일을 이뤄야 하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예에서 보듯 하나의 민족이 사이좋게(이게 가장 큰 철칙입니다) 두 나라를 이뤄 살면 안 되는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이런 생각을 공공연히 주장했다간 ‘반통일분자’에 ‘반민족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테러라도 당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신문쟁이가 된 지 30여년이 흘러 펜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 돌아보니 보람보다는 회한이 앞섭니다. 특히 파수견으로서 수상한 그림자를 보고 짖는 대신 달만 보고 짖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나 설사 ‘달보고 짖는 개’였다는 지적을 면치 못할망정 그 의도는, 그리고 목적은 우리 마을, 우리 사회, 우리나라를 지키고 잘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충정만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무딘 붓질에 혹시라도 마음 상하신 분들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리면서 명칼럼니스트이기도 했던 존경하는 은사 최정호 전 연세대 교수가 과거 어느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다 끝마칠 때 했던 인사말씀을 저도 독자 여러분께 올리겠습니다. ‘我又後秘多再言(Auf Wiedersehn)!’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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