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불평등과 무력감은 민주주의의 적 기사의 사진

“차별에 찬성한다는 20대의 ‘남보다 한 발 더 앞서기’는더 큰 불평등 악순환 낳아”

최근 정치와 민생의 처지가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민주주의란 두말할 것도 없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체제다. 그렇지만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입법·사법·행정부에 위임돼 있다. 민주주의 체제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는 여럿이겠지만, 민주주의가 아닌 것의 척도는 비교적 분명하다. 대다수 구성원들이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 체제는 민주주의로 보기 어렵다.

무력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위임한 권한이 대다수 국민의 뜻과 다르게 행사되고, 그들이 그런 배신을 고칠 수 없다고 느낄 때. 내가 불법적으로 손해를 입거나 해코지를 당해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느낄 때. 공정한 기회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요컨대 권한의 행사나 법 집행이 국민의 뜻과 동떨어지거나 자의적인 곳에서 무력감은 팽배해진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무기력의 정점에 있는 부류는 아마도 20대 청년일 것 같다. 지난해 말에 나온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처음엔 반어법인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 차별에 찬성하는 부류가 있고, 그들이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20대라고 한다.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승자독식 원칙과 불평등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20대의 사고구조를 분석한다.

저자가 대학강의를 계기로 만난 그들은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한 KTX 여승무원에 대해 “날로 정규직이 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며, “비정규직이 된 것은 자기계발을 안 한 탓”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일터에 만연한 차별과 해고도 정당하다고 여긴다. 출발부터 기회가 불공평하게 주어졌다거나 경쟁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인식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20대는 사회를 바꿀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사회생활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한 세상에 적응하는 전략은 ‘(닥치고) 자기계발’이다. 그들은 자기계발의 구체적 성과가 없거나, 그것을 얻기 힘든 현실에 대한 좌절을 피하려고 심리적 방어기제를 동원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편견의 확대 재생산, 1위부터 200위까지 4년제 대학을 일렬로 줄 세우는 학력위계주의 등이 그것이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을 놓고 벌이는 이런 게임을 ‘남보다 한 발 더 앞서기’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이 겪는 불평등을 더 많은 불평등으로 만회하려는 악순환을 낳는다.

법치의 불공정성과 그 결과인 불평등이 무력감을 낳는다. 바우만 등 많은 학자의 지적처럼 오늘날 불평등은 경제를 끌어올리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성장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득 불평등은 높은 빈곤율과 중산층 붕괴, 내수 위축, 상호 불신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 등 사회병리 현상을 낳기 때문이다. 또한 무력감 확산을 통해 민주주의 가치도 훼손한다.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인상적인 연설 한 마디를 남겼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구호를 실천하기 위한 정부와 공무원의 구체적 노력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 노력의 결실은 국민들에게 법치와 정의가 살아 있고, 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하청·비정규 노동자를 차별하는 관행, 중소기업의 기회를 앗아가는 대기업의 내부거래와 불공정 거래를 시정하는 게 개혁의 출발점이 돼야 하는 이유다. 복지 확대나 분배의 개선은 그 결과로서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견고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도 문제의 인식이 출발점이다. 지금과 같은 사회의 대안은 없는 것이 아니라 많고, 경제 성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 사람들 간의 불평등과 경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협동이 사회의 근간이었던 시대가 훨씬 더 많았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이 힘을 합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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