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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철 칼럼] 박정희와 김대중은 진작 화해했건만

[성기철 칼럼] 박정희와 김대중은 진작 화해했건만 기사의 사진

“여야 정쟁과 이념대립 부르는 영호남 갈등은 지역탕평 인사로 풀어야”

1999년 5월 13일 대구의 한 호텔. 김대중 대통령은 40여명의 대구·경북 출신 원로저명 인사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킴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한 것을 누가 뭐래도 큰 업적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수십년 동안 지역차별로 피눈물이 났기 때문에 경상도 차별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 대통령의 발언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고,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을 전폭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만찬 분위기를 기자들에게 전한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자로 김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과 화해했다”고 평가했다.

2004년 8월 12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동교동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재로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한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2010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나는 뜻밖으로 아버지에 대해 사과하는 박 대표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손을 잡았다. 박 대표의 사과의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고 회상했다.

대구 만찬 모임과 동교동 회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그리고 영남 정치세력과 호남 정치세력의 상징인 박정희와 김대중이 간접적이나마 화해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지도자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영호남 지역감정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정치적 대척점인 두 지역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박근혜와 문재인의 표는 영호남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양측이 국민 대통합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금의 여야 정쟁과 보수·진보 세력 간 대립은 영호남의 반목과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영호남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정쟁과 이념대립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다. 오죽했으면 영호남 의원들이 ‘동서화합포럼’을 만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 상호 방문에 나섰을까.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일회성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가장 실효성 있는 영호남 갈등 해법은 대통합 인사다. 조선시대 남인과 서인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도 따지고 보면 집권세력의 인사 독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박정희·김대중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영호남 갈등이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역편중 인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정부에선 호남편중 인사가 극심했고, 비교적 균형 잡힌 인사를 한 노무현정부를 거쳐 이명박정부에선 영남편중 인사가 판을 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때 대탕평 인사를 공약했으나 정반대 행보를 하고 있다. 현재 내각에는 호남 출신이 고용노동부 장관 1명뿐이다. 5대 권력기관장에도 호남 출신이 배제돼 있다. 행정부의 두 축인 국무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이 영남 출신이어서 각종 인사와 정책에서 영남 출신이 많은 혜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 대통령이 진정 국민 대통합과 ‘100% 대한민국’에 뜻이 있다면 취임 1주년을 맞아 획기적인 인사로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 대통령제 하에서 여야를 아우르는 거국내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당이 동참하길 꺼리기 때문이다. 결국 능력있는 호남 인사를 고위직에 대거 기용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 영남 보수정권에서도 상징성이 큰 국무총리를 호남에 할애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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