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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경래 (4) 경향신문 복직… 화장실서 ‘월남전 파병’ 특종을

[역경의 열매] 김경래 (4) 경향신문 복직… 화장실서 ‘월남전 파병’ 특종을 기사의 사진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는 대만 필리핀 한국 3개국 청년 5명을 초청해 미국에서 강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1959년 2∼5월 70일 동안 미국 20여개 도시에서 50여 차례 강연했다. 나는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고 공산주의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교인들은 한국교회와 국민을 위해 모금에 동참하기도 했다.

미국 출국 전 나를 기자로 추천했던 오소백 경향신문 사회부장을 찾아갔다. “제가 미국 갈 기회를 얻었어요. 미국에서 기획기사를 써보면 어떨까요? 저를 미국 특파원으로 임명해주시면 기사를 준비해보겠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를 취재했다. ‘정말 공부를 잘 안하나’ ‘애국심이 없는가’ 등이 르포 기사 제목이다. 취재 결과 본국의 우려는 기우이거나 과장에 불과했다.

기획 기사 연재를 계기로 경향신문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바로 일하지 못했다. 재집권에 혈안이 된 이승만정부가 59년 4월 경향신문 폐간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 등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가 빌미였다. 경향신문은 60년 4·19혁명 후 이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날인 4월 27일 복간됐다. 나는 60년 5월 경향신문에서 일하게 됐다.

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치부에서 일하던 나는 5·16 직후 쿠데타 사령부격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기자로 출입했다. 하지만 기자들에게는 암흑기였다. 취재원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우방국 미국은 베트남전(1960∼75)에 뛰어든 상태였다. 국내에서는 베트남 파병 여부가 큰 관심사였다.

62년 5월 11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서울 경복궁 옆에 있는 최고회의 건물로 출근했다. 현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있는 자리다. 3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평소 눈인사 나누는 최고위원 1명과 마주쳤다. 얼굴이 무척 상기돼 있었다. ‘뭔가 큰 일이 있는 게야.’ 나는 넘겨짚었다. “어디 먼 데 가십니까? 월남이나….”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난 지리산 공비토벌 하러 가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파병이 결정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확인을 해야 했다. 나는 최고위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남자 화장실 한 칸을 차지했다. 회의 후 최고위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 골치 아프게 됐어. 베트공이 많다는데….” “파병하면 국가 이익이 엄청나니 그 정도 희생은 각오해야지.” 외교가에 소문으로만 나돌던 파병이 결론난 게 분명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충정로에 있던 베트남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직원 대부분 퇴근한 뒤였다. 3등 서기관 1명이 잔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는 사실을 아느냐?” 그는 놀랍게도 “당연하지(Of course, I know!)”라고 했다. 선발대는 어제 이미 베트남에 도착했고 단장은 내일 떠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신문사로 돌아와 기사를 썼고 6시간 후 송고했다.

5월 12일자 경향신문 1면. ‘월남에 군사고문단 파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최고회의가 전날 비밀리에 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보도 여파는 매우 컸다. AP UPI 로이터 등 전세계 통신사가 경향신문을 인용해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보도했다. 최고회의는 바로 기자실을 폐쇄했다. 기자들은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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