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불필요한 규제와 효율적인 규제 기사의 사진

“사회적 규제가 실효성 가지려면 단속의 불시·무차별성, 처벌의 엄혹함 갖춰야”

수년 전 늦가을 우리나라 기자 5명이 미국 대사관 직원 둘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시애틀 공항에서 세관원은 우리 일행 중 하필 대사관 통역담당 여직원의 소지품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핸드백, 여행가방은 물론 포장한 짐까지 모두 다 열고 찢고 탈탈 털어 보는 것이었다. 속옷 등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는 소지품도 예외 없었다. 일행은 소지품 검사가 끝날 때까지 2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공항에서 수하물 전수 검색 대상은 무작위로 선정된다. 예를 들어 검색대를 통과하는 50번째 여행객이 대상이 되는 식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세관은 마약이나 탈세 목적의 사치품이 들어 있을 낌새가 있는 소지품이 X선 투과기에 잡히거나, 그럴 만한 사람만 검색한다. 인천공항은 출입국 수속이 간편하고 소요시간도 짧은 것으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밀수나 탈세를 억제하는 효과도 과연 그만큼 클까. 미국의 무작위 방식이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더 클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범죄의 예방이나 억제는 처벌의 단호함이나 가혹함 정도에도 좌우된다. 그렇지만 어떤 요령만 알면 단속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될 경우 범법의 유인은 더 커진다. 요컨대 단속의 불시성과 무차별성, 그리고 처벌의 단호함과 엄혹함은 규제가 실효성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법을 어기면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르고, 걸리면 예외 없이 엄중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법은 살아있고, 효율적인 규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 근로조건, 보건, 환경보호 등을 위한 사회적 규제, 그리고 반독점 규제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원칙적으로 완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규제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실효성을 잃은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규제 당국이 주로 예고된 일제 점검을 통해 단속 실적만 쌓을 뿐 처벌은 가볍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 관련법을 보면 갖춰야 할 보호구와 안전장비의 규격 등이 상술돼 있지만, 실제 작업 중에 규정들이 준수되는지 여부는 예고된 일제 단속으로는 알 수 없다. 그 결과 산업재해, 특히 중대 재해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반면 미국은 철저하게 결과에 책임지게 한다. 평소에 시시콜콜한 규정 위반을 일일이 단속하지 않지만, 중대 산재나 환경오염 사고가 나면 종종 기업이 망할 정도로 엄정하게 책임을 묻는다.

최근 고객들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유출한 카드회사들에 대한 규제와 단속은 허술했다. 금융기관들은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암호화해야 한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금융사 103곳 중 60곳이 개인정보를 암호화하지 않았다. 이 경우 600만∼24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암호화에 드는 큰 비용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다. 2011년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킨 농협, 현대캐피탈, 삼성카드, 하나SK카드 등에 대한 처벌은 ‘기관 주의’ 경고와 감봉, 과태료 600만원에 그쳤다. 금융감독 당국은 사고가 터질 때에만 고객정보 암호화 여부 실태 조사를 벌였다. 금융기관들은 규제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부는 보안업무를 하청업체에 맡기기에 이르렀다. 규제 당국이 금융소비자는 안중에도 없고 금융사의 편익만을 염두에 둔 탓이다. 이쯤 되면 규제 당국이 규제 대상에 포획됐다고 할 것이다.

현 정부도 규제 완화의 나팔을 소리 높여 불고 있다. 인허가 관련 규제에는 불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역대 정부가 다 한 차례씩 정비했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없어지지 않는 규제는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힘센 집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규제총량제에 따라 부처별로 할당하는 규제 완화는 무의미하다. 부당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규제와 단지 규제 당국의 존재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 규제는 버리고, 꼭 필요한 규제는 내실화, 효율화해야 한다. 그에 따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하고, 그것이 체질화되면 사회적 규제는 더 이상 규제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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