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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만 칼럼] 박근혜정부의 토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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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토론능력이 바로 국정의 창조력. 관리들의 언론능력은 문화융성의 척도다”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이 발언은 조선 성종 24년(1493년) 홍문관원 유호인이 왕의 뜻에 반대하자 동료 성세명이 유호인을 두둔한 말이다. 유호인은 홍문관이 탄핵하고자 하는 한 인사에 대해 성종이 봐 주도록 요청했지만 왕명이 부당하다는 의지를 개진한 터였다.

조선 성종이 누구인가.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시켰고 정치 전반에 걸쳐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삼사(三司)를 두어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기틀을 잡은 왕이다. 그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의 언론을 중시함으로써 조선의 관리들이 의를 통하여 국정의 철학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장려한 군주다. 그럼으로써 조선의 관리들은 성리학적 이상의 구현이라는 공통된 사명감으로 국왕과 대신들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조선조 젊은 관리들의 도덕정치를 지향한 이런 노력에 대해 신간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민음사)는 “지배층의 범위를 제한하고 자질을 향상시킨 측면에서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논평하고 있다.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 존 왕이 귀족들의 권리를 승인한 칙허장으로, 17세기 들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전거로 사용된 대헌장이다.

이런 도덕정치의 이상은 요즘 KBS 주말 대하사극 ‘정도전’에서 묘사하고 있듯, 이성계 조선 개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의 멘토인 정도전은 평소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는 말로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시켜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통해 뜻을 펼쳤다는 야망을 실현한 도학자. 조선 관리들의 이런 지향은 왕권이 올바르지 않게 행사될 경우 도저한 저항력을 행사했고, 경륜이 전 왕들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는 조선 최대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쇄골표풍’이라 하여 사람의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기까지 한 연산군의 살기등등한 광기 가운데서도 조선 사대부들의 이상은 주눅 들지 않았다. 조선조 관료제의 운영과정에서 언론은 공적 질서를 추구하는 신료들의 목소리로 기능했고, 그런 연유로 강개한 오피니언 리더들은 왕조의 전 시기에 걸쳐 무수하게 배출될 수 있었다.

지난 5일 국무조정실·국민권익위원회·법제처로부터 시작돼 24일까지 진행되는 2014년 정부 업무보고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학생 직장인 등 시민들과 민간 전문가들이 참석해 부처 간부들에게 질문하는 토론식 업무보고다. 각 부처별로 업무보고 직후에는 외부 전문가들이 참석해 자유토론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토론이 얼마나 활성화되고 있는지는 아직 실감되지 않는다. 형식보다는 내용의 진정성을 보여 달라는 말이다.

지난달 6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도 SNS 등에 ‘박근혜 대통령 신년 구상 발표 및 기자회견 질문지’라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각본에 의한 질문과 답변의 논란이 있었지만 현 정부의 소통력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토론과 경연(經筵)이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창조성을 높이는 거버넌스라면 국무위원들의 받아쓰기처럼 비쳐지는 국무회의는 가장 먼저 경직성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국무회의가 웃음과 기지와 여유가 흘러넘치는 회의로 비쳐질 때 국민들의 신뢰감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지난 6일 청와대가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해임 소식을 알리는 데도 단 16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민경욱 대변인은 딱 한 문장짜리 원고를 읽자마자 곧바로 연단을 내려갔다. 청와대가 질문도 받지 않고 1분도 안 되는 초 단위 브리핑을 함으로써 소통을 기피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유쾌하지 않은 브리핑일수록 기름을 많이 칠하고 공을 들여 상황을 반전시키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토론능력이 바로 국정의 창조력이다. 관리들의 언론능력이 얼마나 발휘되느냐가 바로 문화융성의 척도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임순만 편집인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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