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경 수천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작전을 계획했던 사실이 정부 문건에서 드러났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가 대량학살 사태 직전까지 갔었던 정황이 나온 셈이다.

문건에서는 군부 수장이 지난 20일 대테러 작전을 위해 병력 2500명을 수도 키예프에 투입하도록 지시한 사실도 확인됐다고 FT는 전했다. 이날은 지난해 11월 21일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래 최대 참사가 발생한 날이었다.

시위가 극에 달한 18~20일 키예프에서 사망한 사람은 시 당국 집계로 77명이다. 야권은 20일 하루 동안에만 100여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문건에 기록된 계획들이 실행에 옮겨졌다면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문서에서는 20일 키예프 중심부 광장에서 시위대를 사살한 저격수들이 우크라이나 특수부대 오메가 소속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문서는 야누코비치의 범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도주 중인 야누코비치에겐 민간인 학살 혐의로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다.

대통령실장 유리 일린의 서명이 있는 한 전보에는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남부에서 3개 군부대를 키예프로 진격시키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시위대가 ‘잠재적으로 위험한 군 시설’을 점거할 계획이라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첩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명령은 무장한 군대를 검문소에 배치해 시민이 소지한 서류를 수색하거나 압수할 수 있게 했다. 테러리스트가 은신한 것으로 판단되는 민가를 수색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이들 문서는 키예프 외곽 야누코비치의 호화 사저 인근에 버려진 종이더미에서 발견됐다. 야누코비치는 21일 사저를 떠나기 전 문제가 될 만한 정부 문서를 소각하거나 사저 내 인공호수에 버렸다. 상당수 문건이 파기되지 않고 남았다는 것은 그가 급히 도주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크라이나 기자들과 시위대는 야누코비치의 사치 생활을 보여주는 영수증을 찾아내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내무장관 대행 아르센 아바코프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야누코비치가 21일 대통령 행정실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키예프에서 동부 하리코프로 날아갔다고 설명했다. 시위대 강경 진압에 책임이 있는 야누코비치는 야권에 권력이 넘어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리코프 대통령 관저에서 하룻밤을 묵은 야누코비치는 이튿날 대국민 성명을 영상으로 녹화한 뒤 도네츠크의 공항으로 이동했다. 경호원을 대동한 그가 뇌물까지 쓰며 출국을 시도하다 저지당한 장소가 이곳이다. 야누코비치 일행은 이날 밤 크림반도로 우회했고, 반도에 도착해서는 대통령 전용이 아닌 민간 휴양소에 머물렀다.

크림반도는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자치 지역이다. 이곳에서 흑해를 건너면 러시아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하려 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24일 새벽 체포조를 피해 반도 남쪽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의 벨벡 공항으로 가려다가 SBU 국장대행 등이 먼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라클라바 마을로 선회했다. 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행적은 여기까지다.

현지 텔레비전 방송 ATR은 자체 소식통의 전언을 토대로 야누코비치가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 함대 기지에 은신해 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우니안 통신은 러시아가 야누코비치를 위해 상륙함을 준비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군사 소식통은 자국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흑해함대 군함이나 시설에 야누코비치는 없다”며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야누코비치가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를 무력 진압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야기한 책임이 있다며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우기 위한 절차에 착수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5일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을 시작했다. 조기 대선은 5월 25일 치러진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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