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박종성] 게으른 정치는 이제 그만 기사의 사진

재작년 겨울에 폴란드 친구 내외가 서울을 찾았을 때 필자는 웅장한 저 건물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라고 일러준 적이 있다. 그 순간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국민들은 저 웅장한 건물을 늘 보면서 분통이 터지는데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 건물을 안 봐도 되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게으름에 대한 질책이다. 한국이나 폴란드나 정치인은 잘해야 본전이요, 대개는 도매금으로 비판과 조롱,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 점에서 다르지 않은 듯싶다.

놀고 먹어도 되는 삶이란 예사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만 꿔보는 일이지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신화적 전통에 기대면 이 ‘게으름’의 특권은 신에게만 귀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서사시는 신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덜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고 노래한다. 인도에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우주는 궁극의 꿈을 꾸는 존재, 위대한 신 비슈누의 위대한 꿈이라고 노래한다. 잠을 자는 행위가 모든 것이 정지 상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내밀한 움직임과 이치가 작동하는 상징성을 갖는다고 보면 게으름이 갖는 신화적 함의는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헤시오도스는 ‘일과 나날들’의 서문에서 인간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노동은 인간의 덕목이요, 게으름은 신의 특권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노동을 통해 창조하고 신은 잠자기와 같은 게으름을 통해 창조한다는 논리가 신화의 전통에서는 설정된다. 성경에서는 야훼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했지만 특별하게 인간만은 행위를 통해 만들어낸 내력을 전하고 있다.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된 인간이든 신이 행한 노동의 결과로 창조된 인간이든, 사람이라는 피조물은 노동을 자신들의 숙명이요 덕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가혹한 대접은 노동의 덕목을 망각한 듯 평소에는 게으름의 특권을 누리려 하고 선거철이 되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내는 것이 능력인 양 처신해 왔던 것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님(The Zero)’으로 치부되다가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으로부터 천심을 대변하는 심판자의 지위를 부여받으며 위대한 ‘하나(The One)’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이 바로 국민들이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젖과 꿀의 달콤함이 가득한 정치인들의 언사의 향연에 더 이상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 현란한 언사로써 선거 승리, 집권, 의원직 선수(選數) 늘리기를 창조 행위의 궁극적 목표로 인식하는 정치권의 일부 그릇된 유산에 국민들은 오랫동안 염증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지지율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야당은 안철수 열풍에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겠노라고 결기가 대단하다. 안정된 지지율에 기대어 안일한 독주를 즐기던 집권여당은 야당의 결기에 자극받아 움직임이 부산하다. 어떤 경우이든 정치의 지형도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정치권의 신선한 동력을 체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 변화와 맞물려 치러지는 지자체 선거의 한마당이 머리와 수족을 움직이는 창조적 노동 행위로 그득한 정치권을 국민들 앞에 선사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긍정적 창조를 위한 게으름의 이치는 정작 놓쳐 버리고 게으름의 특권만을 욕망하는 정치권의 집착이 신의 특권과 일대일 함수관계로 고착화되는 국가에 미래와 희망이라는 단어, 그리고 정치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의 표제어에서부터 사라진다. 정작 젖과 꿀이 흘러야 하는 곳은 저 웅장한 건물 속이나 현란한 언사(言辭)의 향연장이 아니라 밥을 불사약인 양 여기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의 삶의 현장이요, 생채기로 너덜해진 국민들의 영혼이다.

박종성(방송통신대 교수·국어국문학과)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