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봄은 어떻게 오는가? 기사의 사진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이 일으킨 파장이 크다.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 그것은 사회적 타살이었다. 자살을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줄어들수록 극단적 선택의 인력이 커지는 법이다. 그 안타까운 죽음은 지금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기호가 되고 있다. 이 무정한 세상을 향해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원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죄송합니다’였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말일까? 처연함조차 없는 그들의 담백한 말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땅 끝’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던 예수의 말이 아프게 떠오른다. 땅 끝은 저 먼 나라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다가가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땅끝이 있다.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땅끝이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인 아감벤은 사회에서 쉽게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일러 ‘호모 사케르’라 했다. 문자적 의미는 ‘거룩한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잉여인간이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꺼린다. 그 만남이 야기할지도 모를 불편함과 감정적인 얽힘이 싫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교회를 짓기 전에 먼저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라고 말했다. 그런 겸허한 경청이 있다면 오늘의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교회는 ‘땅끝’으로 가야 한다. 저 먼 땅끝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는 땅끝 말이다. 지난해부터 몇몇 교회들이 서울시와 함께 ‘위기가정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목표는 아주 소박하다. 아직 복지행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대에 머물고 있는 이들,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 조금만 거들어주면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의 비빌 언덕이 돼 주자는 것이다. 쪽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 그중에서도 아이들을 둔 가정의 주거환경을 바꿔줌으로써 그들이 밝고 건강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 기본 목표다. 물론 그것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엎드려 길을 내는 마음을 통해

세 모녀의 죽음은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교회에 대한 기소장인지도 모르겠다. 작고한 시인 고정희의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이라는 시는 우리의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이 곤궁한 시대에/ 교회는 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교회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너무 많은 거짓을 가졌고/ 너무 많은 보태기 십자가를 가졌고/ 너무 많은 권위와 너무 많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파당과 너무 많은 미움과/ 너무 많은 철조망과 벽을 가졌습니다/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가진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장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침묵으로 번창합니다.’ 이런 고발이 억울할 수도 있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고발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그 상황을 역전시킬 때 교회는 교회다워질 것이다.

남녘에서 들려오는 꽃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가든하지 않은 것은 이 땅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피울음소리 때문이다. 봄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이들,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춘 이들, 엎드려 길을 내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 온다. 그런 봄에 무임승차하지 말 일이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