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한승주] 배우 브래드 피트의 변신 기사의 사진

지난주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빛났던 배우는 브래드 피트다. 생방송 중 배달된 피자를 자청해 나눠주고 배우들과 ‘셀카’를 찍는 모습도 신선했지만, 진짜 감동은 마지막에 있었다. 작품상 수상작으로 ‘노예 12년’이 발표되자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하는 영국 흑인 감독 스티브 매퀸을 끌어안고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었다. 흑인 감독이 아카데미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피트와 ‘노예 12년’이라? 언뜻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할리우드 대표 미남 배우이자 미국영화계의 주류 인사인 피트. 그는 ‘노예 12년’의 제작자이자 작지만 의미 있는 역으로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예 12년’은 184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노예제도를 둘러싼 폭력의 역사를 폭로한 작품. 노예제도는 미국 근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소재이자 흥행도 잘될 것 같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피트가 이 영화의 제작자로 나섰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매퀸 감독이 “피트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 아카데미 3관왕에 빛나는 ‘노예 12년’은 그의 뚝심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영화다.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기획한 것도, 감독을 섭외하러 영국에 찾아간 것도 그였다.

데뷔작 ‘헝거’(2008)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매퀸 감독의 실력을 단번에 알아본 피트는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 그를 만났다. 흑인 감독에게 ‘노예 12년’은 어쩌면 숙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망설여지기도 했다. 결국 피트의 설득에 마음을 굳힌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그 결과 배우로서는 아카데미와 인연이 없었던 피트가 제작자로서 처음으로 작품상을 받게 됐다.

미남 배우의 변신, 할리우드에선 낯설지 않다. 이미 로버트 레드포드나 조지 클루니 등이 걸었던 길이다. 이들은 중년을 거치며 단지 잘생긴 흥행 배우로만 머물지 않기 위해 변화를 시도한다. 전형적인 상업영화 대신 저예산 독립영화에 출연하다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이후 제작자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스타 배우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피트의 ‘노예 12년’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영화계에 대입하자면 장동건 같은 미남 스타가 제작자로 변신한 뒤 우리 근현대사의 민감한 사안을 기획한 셈이다. 그 후 명망 있는 감독을 찾아가 설득해 영화를 만들고, 자신도 조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한국에선 쉽게 상상이 안 가는 ‘그림’이다. 우리는 배우가 감독으로 변신하는 것에 그리 관대하지 않다. 그동안 몇몇 시도는 있었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이런 주제들은 주로 독립영화로 제작된다. 유력 배우가 출연하지도 않는다. 투자는 더 어렵다.

부럽다. 할리우드의 풍토가. 출연료나 광고 수입으로 배우들이 개인의 부(富)를 불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나누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전 세계인에게 영감을 줄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멋진 사회 참여인가.

최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에서까지 거론됐다. 이런 내용이 미국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이런 기세라면 우리도 단지 잘생긴 배우를 넘어선 피트 같은 배우가 나올 날을 기다려볼 만하지 않을까.

한승주 대중문화팀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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