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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염운옥] 故 토니 벤의 민주주의정치

[글로벌 포커스-염운옥] 故 토니 벤의 민주주의정치 기사의 사진

토니 벤(Tony Benn) 영국의 노동당 전 당수가 14일 타계했다. 1925년생인 벤은 산업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 노동당 당수를 지냈다. 벤은 노동당 좌파 정치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에드워드 밀리반드 노동당 당수는, 벤은 ‘힘없는 사람들의 영웅’으로서 “권위를 집어던진 위대한 의원, 신념 있는 정치가로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벤은 훌륭한 작가이자 연설자였으며 운동가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물론 캐머런은 보수당 총리답게 ‘그가 하는 대부분의 말에 찬성할 수 없지만’이라고 유보를 달았다.

귀족 출신인 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BBC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로 활동하다가 50년 정계에 입문해 2001년 은퇴할 때까지 50년 동안이나 영국 하원의원 자리를 지켰다. 4대 연속 의원을 배출한 정치 명문가 출신인 그는 20대 중반 나이에 사망한 부친의 귀족작위를 물려받기를 거부, 상원의원직을 포기하고 하원에 진출한 첫 의원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공화주의자로서 종신직인 상원을 ‘은퇴한 노땅 정치가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라고 비난했다. 벤은 대처가 득세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 민주적 사회주의의 추진을 통해 대처주의에 맞서고자 했고, ‘벤 좌파’라고 불린 노동당 급진좌파가 형성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영국의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단체인 ‘전쟁반대연합(Stop the War Coalition)’을 이끌었다. 좌파가 직면한 어려움을 벗어나려면,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로 승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했으며, 의료와 대학 민영화 반대 운동에도 앞장섰다.

특권과 권위를 거부했던 그는 “희망은 진보의 연료이고, 절망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같은 어록을 많이 남긴 정치가로도 유명하다.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 영화 ‘식코’에 출연한 벤은 민주주의에 관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공적 의료보험 시스템이 ‘인간을 위한 예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건이며, 다수가 참여하여 요구해야 하는 것임을 역설하면서 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세계 인구의 1%가 80%의 부를 누리고 있는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면 민주투쟁이 된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가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국민을 통제한다.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첫째는 겁을 주는 것이고, 둘째는 기를 죽이는 것이다. 인민들이 두려워하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길들이는 것, 자신의 역량을 믿지 못하도록 알아서 기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통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곱씹어 보자.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풀면, ‘데모스(민중, demos)의 힘’을 뜻한다. 다수결의 원칙, 다수의 지배, 다수의 통치, 대의제 같은 상식적 정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정확하게 담지 못한다.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cratia)는 ‘데모스’에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를 합친 말이다. 데모크라티아는 군주정(monarchia)이나 과두정(oligarchia)처럼 ‘지배, 근거, 원리’를 뜻하는 아르케(arche)가 붙는 말이 아니다. ‘데모스의 힘’이라고 민주주의를 정의할 때, 남녀, 노소, 피부색, 국적, 빈부, 교육의 정도 그 어떤 것도 타인을 지배하거나 배제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다스림’을 정당화할 자격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벤은 2001년 정계 은퇴연설에서 이제야 정치를 할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정치가 삶을 바꾸는 것,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신념을 평생 신봉했으며, 누구든 어떤 배경을 지녔든 모두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평생 실천했다. 대의제와 의회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넓은 의미의 정치에 대한 고민, 데모스의 역량에 대한 무한한 신뢰. 벤이 괴짜 이상주의자였지만 영국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이유였다.

염운옥 고려대 연구교수·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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