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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새로운 100년의 약속] (11) 한국 YMCA를 만든 선교사들 (下)

[YMCA, 새로운 100년의 약속] (11) 한국 YMCA를 만든 선교사들 (下) 기사의 사진

한국NCC 창설 도와주고 국제적 지평 넓혀

존 모트(J R Mott·1865∼1955). ‘현대판 바울’로 불리며 세계YMCA와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운동의 선구자였던 그는 한국Y 운동이 뿌리 내리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모트는 한국 청년들의 Y설립 청원운동(1899년)에 응답해 라이언(D W Lyon)을 조사관으로, 질레트(P L Gillett)를 한국Y 조직 간사로 파송했다.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Y지도자들을 투옥하고 2년 뒤에는 유신회(維新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 Y를 점령하고 해산을 시도할 때였다. 당시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사건 수습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현 한국Y연맹)’를 창립(1914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로써 한국Y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는 한편 1924년 세계Y연맹에도 가입하게 된다.

모트는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발전에도 한 획을 그었다. 세계 최초의 에큐메니컬 선교사 대회인 ‘영국 에든버러 대회(1910)’를 이끈 주역인 그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처음 방한했던 1907년 2월, 그는 6000여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을 했다. 윤치호가 통역을 맡았다.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한 뒤에는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국가(예루살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트의 배려로 에든버러 대회에는 질레트와 마펫, 언더우드 선교사 등 15명이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한국인으로는 윤치호가 유일하게 참석했다. 모트는 1924년 한국NCC, 즉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창설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5년과 1929년, 두 차례 방한했을 때는 한국NCC 운동을 지원했다. 1925년에는 전국교계지도자대회(의장 윤치호)가, 1929년에는 전년도에 개최했던 국제선교협의회(IMC) 세계대회(예루살렘국제선교대회·한국 대표단장 신흥우 YMCA 총무)의 보고대회가 열렸다.

모트는 IMC 회장(1912∼1942), 세계Y연맹 회장(1926∼1937) 등으로 활동하면서 세계에큐메니컬운동과 Y운동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WSCF)을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았고,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에 붐을 일으킨 학생자원봉사단 회장(1915∼1928)도 역임하는 등 학원선교에도 힘을 쏟은 평신도 운동가였다.

모트의 이 같은 경험은 192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WSCF세계대회에 한국Y 대표로 이상재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을 참가하게 만들었다. 한국Y는 WSCF에 가입한 데 이어 대회에 참석했던 김활란 김필례 등이 그 해에 한국YWCA 창설을 주도한다.

한국Y 운동의 시작과 연합회 창설에 있어 플레처 브락만(F S Brockman)의 역할도 눈에 띈다. 그는 1903년 3월 한국Y 창설준비회의 강사로 초청돼 각국 공사와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Y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노력으로 한국Y의 창설 준비와 함께 Y회관 건축비 모금운동까지 시작할 수 있었다. 1901년부터 15년 동안 중국Y 제2대 총무로 섬기면서 세계적인 Y지도자가 된 브락만은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시절 윤치호와 동창이었다.

그의 동생 프랭크 브락만(F M Brockman) 역시 학생Y 조직과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창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당시 Y총무였던 질레트와 함께 서울시내 각 미션스쿨 안에 학생Y를 조직하고 1910년 6월 진관사에서 제1회 학생Y 하령회를 개최했다. 당시 그는 “학생 하령회를 계기로 각 학교에 학생Y가 조직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학생Y 하령회가 조직적인 학생Y 운동의 첫출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학생Y는 1911년 제2차 학생Y 하령회에 참여했던 선천 신성중학교 및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경신중학교 등의 학생들이 ‘105인 날조 사건’으로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Y연합회 창립과 3·1운동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연합회는 9개의 학생Y(배재학교, 경신학교, 세브란스의전, 한영서원(현 송도고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기청학관, 재일본한국Y)와 1개 시청년회(현 서울Y)로 결성된다. 프랭크 브락만은 1905년부터 1929년까지 24년간 이 모든 한국Y의 여정에 뛰어들어 헌신한 뒤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질레트, 헐버트, 게일에 이어 존 모트와 브락만 형제…. 한국Y 운동은 많은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어져 왔다. 국제적인 지평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Y운동의 100년 역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이제 한국Y는 새로운 100년의 출발선 앞에 섰다. 민족 운동체에서 생명과 평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지구시민운동체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선교 기관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윤희 사무국장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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