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꼭 비판해야 하는가 기사의 사진

미국 유학시절 수업시간이면 어김없이 많은 과제가 주어졌다. 꼭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크리틱(critic)’이라는 말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비판하시오” 혹은 “비판적으로 서술하시오” 등과 같은 과제였다.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책이나 학자들의 단점을 찾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업시간에 오고 가는 ‘critic’이란 것이 꼭 나쁜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다. ‘아, 진정한 배움이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함께 찾으려는 노력이구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당시 유학시절 배운 것을 적용한 것이 있다. 어떤 질문을 하든 “좋은 질문이에요”라고 받아서 설명하던 교수법이다. 어떤 질문에도 좋은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 교수의 능력이다.

사전적 의미로 ‘critic’이라는 말은 중립적이다. 그래서 음악 연극 문학 등을 ‘critic’ 하는 사람을 평론가라고 부른다. 평론가는 긍정적인 점을 부각시킬 수도 있고 부정적인 면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거나 반대로 긍정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그의 크리틱은 신뢰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착한 비판도 보고 싶다

우리 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영웅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는 영웅을 만들지 않았고 누군가 높이 올라가면 깎아내리기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근대사에는 좋은 정치 지도자가 없다. 영웅이 없는 시대를 사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불행하다.정치가 신뢰성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크리틱의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한 우리나라 정치에서 야당은 여당을 칭찬하지도 여당은 야당을 정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전 대통령의 ‘손톱 밑 가시를 뽑자’라는 끝장토론을 보며 많은 국민이 박수를 보내도 야당은 절대로 칭찬하지 않는다. ‘야당의 기능은 여당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시를 뽑다가 손톱도 뽑을 수 있다’는 어느 야당 지도층의 비판이다. ‘한 번쯤 대통령의 노력을 칭찬해 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야당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진정한 ‘견제’란 무엇일까. 잘못 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고 잘되는 것을 격려하는 것이 진정한 견제가 아닐까. 진정한 정치란 나와 생각이 달라도 유익이 된다면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닐까.

비판의 성경적 관점

태생적으로 의견을 함께하기 힘든 관계가 있다. 정치적으로 여당과 야당이 그렇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그렇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장로와의 갈등이 존재한다. 왜 이런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될까.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맞추라고 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성경적 관점이 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것”이다. 여당도 야당이 되고 야당도 여당이 될 것이다. 며느리는 곧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장로의 자식 중에도 목회자가 나올 것이다. 또한 긍정적 비판은 의견을 맞추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나갈 때 가능하다. 여당과 야당은 자신의 당이 아닌 대한민국을 위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자신의 견해가 아닌 가정을 위해, 목사와 장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갈 때이다.

아름다운 비판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꿈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치부를 비판했지만, 너무나 고마워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김병삼 만나교회·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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