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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동백꽃 매화는 떨어지고

[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동백꽃 매화는 떨어지고 기사의 사진

지난 주말 제주도를 제외하고 봄이 가장 일찍 오는 전라남도 끝자락으로 갔다. 남해안을 끼고 있는 해남, 강진, 장흥, 고흥, 순천…. 그러고 보니 근년 취재하러 자주 간 순천 이외에는 지난 십년 가까이 발걸음을 못 했다. 그 전에는 지역적 연고도 있고 해서 2년이 멀다하고 번갈아 찾던 곳들이다.

서남쪽 끝 해남 두륜산 숲길부터 찾았다.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장춘동. 지명이 벌써 ‘아홉굽이 숲길이 이어지는 곳에 봄이 길다’고 말해준다. 매표소에서 대둔사 입구까지 10리길엔 소나무, 벚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들이 고목들을 포함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여름엔 햇볕이 들지 않고, 가을엔 단풍이 고운 길이다. 동백꽃은 지는 중이고,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길 옆 계곡의 물소리와 나무 속 물기운에 근원적 푸근함을 느낀다.

자작나무과, 참나무과 나무들은 거의 모두 꽃을 피우지 않았다. 올 봄 개화가 일러 살짝 기대를 했건만. 다만 유선여관 옆의 계류 위를 드리운 서어나무(자작나무과) 노거수와 사찰 안 서어나무에 송충이 모양의 꽃이 피었다. 참나무, 소나무, 자작나무과 나무들은 대개 바람으로 수분하는 풍매화이다. 그러나 구실잣밤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일부 참나무과 종들은 꽃에서 꿀이 나와 풍뎅이 등 벌레의 힘을 빌려 수분하기도 한다.

꽃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피어난 게 아닌 까닭에 가루받이를 이루어 씨앗을 맺게 된 꽃은 금방 낙화한다. 동백꽃은 벌과 나비가 귀한 겨울에 피어나기 때문에 곤충도 바람도 아닌 동박새라는 텃새를 중매자로 선택했다. 동백은 꽃송이 안에 동박새가 좋아하는 꿀을 채우고, 동박새는 꽃에서 겨울 양식을 챙기면서 동백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혼례를 마친 동백꽃은 꽃잎은 물론 노란 꽃술까지 통째로 떨어지는데, 그 낙화 풍경이 장엄하다. ‘먼저 떨어진 동백꽃 위로/더 붉은 동백이 몸을 날렸습니다./봄이었구요,/아직도 한라산 자락에 잔설(殘雪)이 남은 4월이었구요.’(변종태, ‘제주섬, 동백꽃, 지다’ 중에서)

동백꽃 지는 모습을 보러 강진 만덕산으로 향했다. 평년보다 조금 이른 낙화시기인 3월 말이었건만, 바람이 불지 않아 십여 년 전 4월 초에 보았던 그 장엄한 낙화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백련사 대웅전 왼편 풀밭에 떨어진 동백꽃과 아직 남은 동백꽃이 적당한 조화를 이뤄 신비하고도 아늑한 공간을 연출했다. 그곳에서 만덕산 탐방로를 따라 800m를 가면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보낸 귤동까지 내려가는 짧은 산길에는 삼나무, 굴참나무, 대나무, 동백, 후박나무 고목, 갑옷의 황금빛 도료로 썼다는 황철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뒤섞여 있다.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이 작은 산에 기울인 세심한 손길과 정성이 느껴진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 29일 선암사 매화를 만나러 갔다. 나는 최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600년 묵은 고매((古梅)인 선암매와 각황전 담 길의 홍매화보다 대웅전 뒤 오른쪽에 있는 고매가 더 마음에 든다.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이종묵 역해)에 따르면 고매는 ‘가지가 구불구불하여 푸른 이끼가 낀, 주름 진 껍질이 있는 품종’이다. 또한 ‘기품 있는 매화는 등걸이 오래되어 기괴한 모습을 띠어야 하고 가지는 몇 되지 않고 비스듬하게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고매가 꼭 그렇다. 바람 골에 위치한 이 고매 주변에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향기, 강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풍부하고도 고혹적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매실을 얻기 위한 매화나무에선 향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장미과 꽃나무들은 원래 씨를 퍼트리기 위해 새들이 먹기 좋도록 작은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과실수로 육종하면서 열매가 커졌지만, 관상용으로는 역시 야생종이 더 우수하다. 옛날 배고프던 시절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지만, 과일이 흔한 요즘은 관상수로서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된다. 살구나무보다 개살구, 복숭아나무보다 개복숭아가 열리는 복사나무, 배나무보다 돌배나무, 매실나무보다 매화나무의 가치가 더 높아진 것이다.

강진읍내에 정약용이 유배생활 초기(1801∼1805)에 머물렀던 사의재(四宜齋)라는 옛집이 있다. 그곳 주막 옆의 매화나무는 비교적 늦게까지 만개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벌 20여 마리가 열심히 꿀을 빨아댔다.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피부로 마시고/내장(內臟)으로 마시고/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진짜 꿀벌들을 만났다.’(황동규, ‘풍장40’ 중에서)

그날 서울에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한꺼번에 피어 버렸다. 다행인 것은 남도의 꽃들은 해마다 이르고 늦음은 있지만, 비교적 순서대로 피고 진다는 것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가운데 동백꽃과 매화의 끝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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