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양동양 ㈔한국파독연합회 고문… 파독 근로자들은 산 역사여야 기사의 사진

파독(派獨) 광부들의 역사는 1963년 12월 21일 시작된다. 그날 123명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독일 땅을 처음 밟았다. 전세기가 도착한 곳은 공업도시인 뒤셀도르프.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절반은 아헨(Aachen)으로, 절반은 루르(Ruhr)로 갔다. 그리고 며칠간 안전교육을 받고 도구 다루는 방법 등을 배운 뒤 섭씨 35도가 넘는 1000m 깊이의 갱도로 내려가 하루 8시간씩 석탄을 캐내는 작업에 동원됐다. 이들을 포함해 1977년까지 7968명이 독일에서 광부로 일했다. 헐벗고 굶주렸던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데에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글뤽아우프(Gl몕ckauf·무사히 다시 만나자)’라는 인사를 나누며 막장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벌어들인 돈이 경제 재건의 초석이 됐던 것이다.

광부들과 함께 독일로 갔었던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2008년부터 모임을 결성해 운영 중이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파독연합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양동양 고문을 서울 양재동 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해 11월 연합회 회장에 당선됐으나 절차상의 문제가 불거져 2009년부터 맡아온 고문 직함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독일에는 언제 갔었나요.

“1진 123명 중 한 사람으로 독일에 갔습니다. 전남 여수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뒤 서울의 국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독일로 파견할 기술연수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봤지요. 사실은 광부였는데, 기술연수생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 여의도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것을 보면서 선진국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터라 응모를 했고, 붙었습니다. 공무원 아니면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우리나라의 열악한 일자리 사정도 저의 결심을 부추겼죠.”

-실제 가보니 어떻던가요.

“한밤중에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동남아를 거쳐 20여 시간 비행했을 겁니다. 도착 직전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광경부터 경이로웠습니다. 전등들이 환하게 켜져 도시 전체가 반짝였죠. 아마 우리나라 80년대 후반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아헨으로 이동하면서 차창 밖으로 본 풍경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 직전이어서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트리들도 많았고, 줄지어 늘어선 2∼3층짜리 아름다운 가옥들과 가로등을 처음 대하면서 ‘이런 세상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별천지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탄광에서의 생활은.

“이틀 정도 안전교육부터 시킵니다. 이어 기초적인 독일어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는데도 갱도로 내려 보내지 않고 지상에서 돌 고르는 일을 시키더군요. 전혀 힘들지 않은 작업이었지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웃지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위생 검사 결과 우리들 중 일부 몸에서 기생충이 나온 것입니다. 그 상태로 갱도로 보내기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약을 먹은 뒤 며칠 지나서야 갱도에 투입됐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독일 정부가 이 사실을 우리 정부에 통보해 2진부터는 기생충 약을 먹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갱도에 처음 내려갔을 때를 설명해주십시오.

“무서웠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 정도 내려간 뒤 다시 조그만 기차를 타고 5분에서 20분 정도 이동합니다. 그러곤 분산돼서 조별로 일터를 찾아가는 형식이었죠. 한 가지 에피소드 같은 걸 소개할까요? 갱도로 내려갈 때는 개인마다 물통과 헬멧 랜턴용 배터리를 갖고 가는데, 8시간 일하는 동안 사용할 것이지요. 그런데 처음에 섭씨 36∼37도 되는 곳에서 석탄을 캐다 보니 일부는 1∼2시간 내에 물을 다 마셔버려 남은 시간 동안 목이 말라 쩔쩔매야 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탄광 측에서 8시간 사용해야 한다고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거죠. 석탄을 캐내고, 철기둥을 세우는 일을 반년쯤 하다 보니 근육도 생기고 적응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월급은 얼마였고,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월급은 평균 700∼800마르크 정도라고 기억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공무원 월급의 7∼8배 수준이었을 겁니다. 숙소는 민박 개념이었습니다. 독일인이 사는 2층짜리 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은 1층에서 살고 우리는 2층에 거주했습니다. 2층에 방이 2개 정도 있는데, 한 방에 침대를 2∼3개씩 놓아 한 집에 5∼6명 정도 살았죠. 두 끼는 숙소 지하층에 마련된 조리대에서, 한 끼는 탄광 구내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 음식을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에 한국식당도 생겼습니다.”

-한국 광부들에 대한 탄광 측의 대체적인 평가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몸집은 작아도 열심히들 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현지에서 아헨 공대를 다녀 박사학위까지 딴 과정을 말해주십시오.

“광산 일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부터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1년 뒤부터 통역도 하고, 교육도 맡게 됐죠. 그리고 3년차 때부터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결국 도시계획 분야의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독일 도시계획 박사 1호입니다. 당시엔 유학파가 귀한 시절이어서인지 해외 과학자 유치 케이스로 82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특채됐습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는데,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격세지감이 대단합니다. 50년 전 경제 문제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문제를 우선시한 듯합니다. 반세기 만에 우리나라가 급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거죠.”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한 이야기 가운데 기억나는 부분이 있습니까.

“박 전 대통령이 방문한 함보른 지역은 내가 일하던 아헨에서 50∼60㎞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에 갔었죠. 몇 십년 만에 부모를 만나는 듯한 격앙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고, 대통령도 제대로 연설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 얘기 가운데 ‘지금은 가난해서 고생하지만 후대에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여러분들의 고생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등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양 고문의 차분함은 여기까지였다. 대통령이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 점점 잊혀져 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과 홀대로 이야기가 옮겨가자 75세인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가끔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부에 세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첫째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애국 업적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처음 파견된 1963년 12월 2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파독 광부·간호사들에 대한 특별공로자 예우입니다. 국가 대 국가 간 협약에 따라 보내져 국권의 신장과 우방과의 친선에 이바지한 만큼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셋째는 적절한 곳에 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올해 초 청와대와 총리실, 안전행정부 등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 답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더 있을 것 같은데요.

“박정희정부가 독일에서 차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파독 광부·간호사라는 ‘인간 담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우리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65년부터 75년까지 1억1530만 달러를 보냈지요. 또한 파독 근로자의 2·3세들이 국내외에서 민간 외교관으로 국익 신장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박’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야말로 ‘파독 광부·간호사 대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행정적으로만 뒷받침했는데 1석3조의 대박을 낸 것이죠. 하지만 현재 파독연합회는 ‘쪽박’입니다. 운영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지요.”

-연합회 사정을 좀 더 말씀해주십시오.

“연합회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70대 회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고 있죠. 연합회 임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임금 없습니다. 여직원 1명만 월급을 받고 있죠. 정부와 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협력해 준다면 해결이 가능할 텐데, 이렇게 몰라주니 실망하는 회원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긍심도 없어졌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처음에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컸으나 지금은 땅에 떨어졌다고나 할까요. 사회의 냉대에 좌절감, 박탈감이 큰 상태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회원들은 70대들입니다. 우리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1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정부가 서둘러줬으면 합니다. 더욱이 독일에 체류 중인 파독 근로자들이 이따금 부럽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통령과 간담회를 가질 수도 있고, 가끔 해외동포 관련 기구들이 도움을 주고 그들의 희망사항을 귀담아 들어주지만 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은 시쳇말로 찬밥신세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독일이나 미국 등에 머물고 있는 파독 근로자들과는 교류하고 있는지요.

“교류가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 열심히 생활해 중산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녀들 교육을 잘 시켜 2세들이 각 분야에서 훌륭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 국력에 큰 보탬이 되고 있는데, 국내에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지난해가 파독 50주년이었는데요.

“예. 많은 계획을 세웠었지요. 하지만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초청해 식사하고, 서울 한남동 독일 외국인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파독 50주년을 테마로 전시회 등을 연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정부와 언론에서 주도한 행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전부 취소하고,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뒤 연합회 사무실에서 간단한 모임만 가졌습니다. 기뻐야 할 50주년이 슬픈 해가 돼 버린 것이지요. 우리나라와 함께 독일에 광부를 파견한 터키의 경우 지난해 터키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독일 정상과 큰 행사를 가졌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딴판이지요.”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연합회 회원들이 국가에 짐이 되고, 국민들을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50년 이상 묵묵히 일하며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습니다. 파독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에 우리들이 했던 일들을 정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듯합니다. 정부도, 어느 사회단체도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참아가며 조국 근대화에 앞장섰던 우리들의 업적을 제대로 기록하지도, 관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스스로 60년대의 거룩한 시대정신에 또다시 혼을 불어넣어 대한민국 정신세계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국민 여러분의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파독 근로자의 역사는 ‘잊힌 역사’가 아니라 ‘산 역사’여야 합니다.”

양동양 고문은

△1939년생(전남 여수)

△1963년 12월, 광부로 파독

△1977년 독일 아헨 공대 공학박사

△1982∼2004년 고려대 교수

△1989년 미국 MIT 객원교수

△1986∼2000년 건설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현)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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