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의 샘] 꽃그늘 아래서 힐링을 다시 생각한다 기사의 사진

꽃은 산중의 달력이라 했던가. 꽃바람이 차례로 불어오는 동안 온 나라 산천이 온통 희고 붉은 꽃 안개에 쌓였는가 싶더니 어느새 푸른 안개로 바뀌기 시작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건만 해가 갈수록 놀랍고 감동스럽다. 이 화려한 잔치에 내 어찌 빠질 수 있으랴.

봄은 잔치이다. 이 흥그러움을 잔치라고 할밖에 달리 표현할 말도 없다. 이태백은 복사꽃 살구꽃이 흐드러진 봄밤, 그 아래서 벗들과 잔치를 열고 ‘봄은 꽃안개 경치로 나를 부르고, 대지는 화려하게 수놓은 무늬로 나에게 보여주네’라고 노래하였다. 시인의 노래를 따라 나도 봄날 잔치 속으로 들어간다. 천만 꽃송이에서 ‘참’을 본다.

성북동에서 서울 성곽을 따라 인왕산 필운대로 이어지는 길로 잡았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상춘(賞春) 코스이다. 혜화문 밖 삼선교에서 삼청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북동은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둔(北屯)이라 했는데, 복사꽃이 하도 고와 도화동(桃花洞)이라고도 불렸다. 여기에서 서울 성곽을 따라 숙정문과 자하문을 거치면 인왕산의 수성동이다. 이 일대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의 배경이 되는 청풍계, 세심대, 수성동, 인왕산, 필운대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옛길에서 옛사람들의 춘흥(春興)을 만난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산길을 걷느라 숨은 가쁘고 몸은 젖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더없이 시원하다. 인왕산 정상에 오르자 품 넒은 산자락이 무수한 꽃다발을 선물해오는 듯 화려하다. 옛 한양의 판국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수락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섰노라니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힐링이 되는 듯하다.

사람들은 오늘을 스피드의 시대라고 한다. 고속으로도 모자라 광속이란 말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틀린 말도 아니다. 또 누군가는 디지털 시대라고도 하고, 물욕의 시대라고도 하고, 경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모두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오늘 우리 사회를 일면적으로 나타낸 말일 뿐 결코 총체적인 면모를 짚어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의 시대를 힐링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든 여행지 홍보든 방송 프로그램 제목이든 여기저기 힐링이 난무한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힐링이 대세이다. 힐링은 말 그대로 치유이다. 힐링을 외쳐대는 오늘은 무엇보다 치유가 간절히 필요한 시대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프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아픈 사람들이고, 오늘은 병든 시대이다. 이처럼 힐링이라는 이름의 이면에는 아프고 어두운 이 시대의 맨얼굴이 숨어 있다.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은 먼저 자연으로 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지만 자연을 거부하고 나선 존재이다. 자연을 거부한 인간 행위는 그 자체로 거짓이다. 거짓이란 의미의 ‘위(僞)’ 자가 인위(人爲)라는 말의 합성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명확한 그 상징성을 읽을 수 있다. 거짓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병들지 않고 어쩌랴. 아픈 사람은 본능적으로 ‘참’을 찾아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참은 자연이다.

노자는 자연의 순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물로 ‘물’을 꼽았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돌아간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대지의 젖줄이 된다. 물은 급하지 않다. 파인 곳을 만나면 채워지기를 기다려 천천히 다시 흐른다. 마침내 물은 바다를 이루어, 넒은 품에 수많은 생명을 키우고 하늘을 닮아 하늘빛을 담는다. 물은 순환한다. 순환함으로써 제 생명을 지키고 건강함을 유지한다.

자연의 도를 닮은 물. 우리는 노자의 말과 정반대로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날마다 다투고 서로를 이기며 살고 있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에 고소득과 고이윤을 좇고, 기를 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세상의 무엇 하나 진정으로 적셔주지도 못하고, 작은 삶 하나 키워내질 못한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며 온갖 성취에 조바심을 내지만 내 마음 하나 채우지 못하고 산다. 품엔 작은 성찰의 씨앗 하나 품지 못하고 위로는 날마다 하늘을 거스른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성에 유폐되어 섬처럼 단절되어 있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랬다. 힐링이 필요해 자연으로 왔음에도 자연을 닮지 못했다. 남 다투어 빨리 올라오고자 했고, 남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잰걸음을 쉬지 않았다. 탐욕을 비우지 못했다. 뿐만이랴. 나의 치유에 욕심내느라 나를 치유해주는 자연은 병들거나 말거나 아랑곳 않았다. 그 자연과 함께 살아오던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도 아랑곳 않았다. 이것은 또 하나의 거짓일 뿐이다.

아프다는 것은 축복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픔에는 이제까지의 삶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 반성이 치유의 출발이다. 설렘과 축복으로 가득한 봄날 잔치. 생의 환희를 맘껏 발산하는 꽃나무들. 그 그늘 아래에서 나를 돌아본다. 힐링이 상품이 되고, 느림마저 경쟁이 된 시대, 잰걸음을 잠시 쉬고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이규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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