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정도전을 위한 변명’ 저자 조유식 알라딘 대표 “정도전 독보적 철학을 가진 위대한 선비” 기사의 사진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린 KBS 주말 대하드라마 ‘정도전’의 가파른 인기 상승세에 힘입어 혁명가 정도전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고려 말기 혼란을 딛고 조선 건국의 사상적 틀을 다진 삼봉(三峰) 정도전은 우리 역사의 비주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지만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서 진 그는 역적으로 낙인찍힌 후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해 뒤늦게 복권됐다. 흔히 신권주의(臣權主義)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역사학자로부터 외면 받은 것은 물론 정치학자로부터도 버림받았다. 그를 대중에게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 바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조유식 대표다. 조 대표는 정도전에 관한 최초의 대중서적인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1997년 집필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다. 지난 25일 서울 중림동 알라딘 본사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정도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도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신문기자가 기사를 쓸 때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 아닌가. 나도 그랬다. 사실 4년 전부터 책을 다시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책 속에 내가 멘트한 부분이 적절한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였다.”

1997년 출간된 조 대표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최근 17년 만에 2판을 찍었다.

-정도전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동서양을 통해 정도전만한 철학을 가진 선비를 찾을 수 없다. 그는 민본주의라는 철학뿐 아니라 상당한 문필력을 갖췄으며 철인정치를 주창하고 실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가령 이인임이란 인물은 요즘 정치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고, 포은 정몽주는 좀처럼 나오기 힘든 인물이긴 하지만 한 세대에 한 명 정도는 나오지 않겠나. 그러나 정도전은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비록 600년 전 인물이지만 독보적인 철학을 가진 위대한 선비로 손색이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동양사상의 창시자인 공자만 하더라도 가끔 비도덕적인 세력과 가까이 하기도 했지만 정도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자는 평생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지 않았나. 반면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인물을 찾아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공자와 맹자는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정도전은 꿈을 이룬 사람이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아 책에 ‘변명’이라는 말을 붙였나.

“사실 그건 내가 정한 제목이 아니고 출판사가 정했다. 다만 그는 역적으로 몰려 내가 정도전에 관한 책을 냈던 1997년까지 학계에서 그에 관한 세미나 한 번 없었다. 2003년에 와서야 삼봉학이란 이름으로 세미나가 열렸을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에서 홀대받았다.”

-사대부를 자처하면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포은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는.

“배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이색과 몽주도 도전과 같다. 목은과 포은도 삼봉을 치려 도모했다. 왜 정도전만 배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나. 또 친구나 스승이라고 봐주면 혁명은 언제 하고 개혁은 언제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 다 봐주니 부정부패가 싹 트는 것 아닌가. 정도전인들 스승을 죽이는 패덕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제지간이요 죽마고우요 하며 얽히고설킨 보수파와 혁명파 사이에서 보수파를 꺾기 위해서는 누군가 악역이 필요했으며 그 역을 도전이 한 것이다.”

-이방원을 어떻게 보나.

“승부욕이 강하고 카운터블로에 능한 사람 아닐까. 상대가 자신을 공격할 낌새를 보이면 사전에 적을 제압하는 장면이 역사 곳곳에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미리 제압한 것도 그렇지만 왕이 된 뒤에도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먼저 공격할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세종을 왕위에 올리고 상왕으로 있을 때 당시 요동을 노략질하려다 충청도에 표류한 왜구들을 보고 대마도 본진이 비었다고 판단한 뒤 기습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다. 왕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본다. 사실 이방원과 정도전이 같이 조선을 이끌었다면 훨씬 활기찼을 것이다.”

-이방원은 왕권 강화를 주장하고, 정도전은 신권을 내세우는 인물인데 원만한 조합이 됐을까.

“신권 중심 사상과 왕권 강화가 마치 충돌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세습 군주가 항상 영민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재상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 사대부의 생각이었지 왕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령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보더라도 뛰어난 재상에게는 반드시 뛰어난 황제가 있었다. 위징과 당 태종, 제 환공과 관중, 여불위와 진시황의 관계 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 아닌가. 기업의 CEO와 재무책임자 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각각의 할 일이 따로 있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같이 가는 것이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란 말이다.”

-이성계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우리 역사에서 독특한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당시 원나라 풍습대로 앞머리는 밀고 뒷머리는 길게 땋은 체두변발 차림의 이성계는 고려 군사를 쌍성총관부로 끌어들이는 안내역을 맡으면서 비로소 역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쌍성총관부 수복 후 공민왕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게 대중대부 사복경(종4품)의 벼슬을 내리고 개성에 집을 하나 내주어 살게 했으니 이때부터 이성계 가문은 이름 없는 변방의 호족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된다. 그의 집안은 천호 벼슬을 하면서부터 지역민들에게 직접 세금을 걷는 조세권을 갖고 있었다. 막부시대 일본의 성주 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함흥의 영주로서 20세 때부터 리더십 트레이닝을 받았다. 대인관계가 탁월했던 매력적인 인물이다.”

사실 조 대표의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들춰보면 이성계와 이방원에게 매우 호의적인 면이 많이 부각돼 있다. 둘 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이끌어내는 데 발군의 재주를 갖춘 것으로 나온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더욱이 태조실록은 이방원의 치세 동안 기록됐기 때문에 이성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실려 있을 수도 없다. 사초를 임금이 보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태종 이방원은 사초를 모두 다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책을 펴낼 때 자료부족 등으로 어려움은 없었나.

“당시 서울대 한영우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참고할 자료는 별로 없었다. 그의 글과 행적이 기록돼 있는 당대의 사료를 통해 정도전의 평생을 재구성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대의 사료는 7권에 불과했다. 그는 이미 600년 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비이면서 정략가였고, 유교이론가이면서 군사지휘자였다.”

-정도전의 사상을 정확하게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도전은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치란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다. 실제로 정도전은 한양 천도를 반대했다.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당시 천도론자들이 개경이 지기가 다해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자 도대체 지기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면서 중국은 20여 왕조가 바뀌면서도 수도는 4∼5개의 도시에 불과한데 그런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냐며 천도에 반대했다. 그는 민본주의자다. 민을 중시하며 국가의 근본이 민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 대명사였으니 역사를 주재하는 신은 그에게 너무 각박했던 것이 아닐까.”

조유식 누구인가… 서울대 운동권 출신, 인터넷서점으로 성공

조유식 알라딘 대표이사는 연매출 2000억원대 기업의 경영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울대 재학 시 운동권에 몸담았다는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바로 ‘강철서신’을 작성한 김영환씨와 함께 민족민주혁명당의 핵심인물이다. 이제는 둘 다 삶의 방향을 바꿨다.

인터넷서점 업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통한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 당시 이미 예스24나 인터파크, 교보문고 등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지만 독자적인 노하우로 신화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진보적 매체였던 ‘말’지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경남 진해(50) △서울대 정치학과(83학번) △저서 ‘정도전을 위한 변명’ ‘한미관계의 재인식’ ‘손바닥 한국경제’ 등 다수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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