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성기철칼럼

[성기철 칼럼] 행정고시를 위한 변명

[성기철 칼럼] 행정고시를 위한 변명 기사의 사진

“보수 낮아 유능한 민간 전문가 공직 지원 꺼려… 행시 폐지는 신중해야”

고건(76) 전 국무총리는 37세에 차관급인 전남지사를 역임하고 42세에 교통부 장관이 됐다. 김용환(82)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40세에 상공부 차관, 42세에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두 사람은 행정고시(행시) 전신인 고등고시 행정과 출신으로, 고속 출세 공무원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행시에 합격해 1년간의 교육을 거쳐 사무관(5급)에 임용되면 고속 승진 보장과 함께 권력과 명예가 주어진다. 1971년까지만 해도 군수가 사무관급이어서 20대 군수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행시가 사법시험과 함께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진 이유다.

그런 행시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궁극적으로 고시처럼 한꺼번에 획일적으로 선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무능력과 전문성에 따라 필요한 직무별로 필요한 시기에 전문가를 뽑는 체제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은 행시와 민간경력채용(민경채·5급 임용)을 5대5 수준으로 맞춰 나가되 결국엔 행시를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 공직사회 젖줄 역할을 해온 행시가 천덕꾸러기가 된 셈이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관료사회의 무사안일과 ‘끼리끼리 문화’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관피아와 민관유착의 폐해가 국민들을 분노케 한 건 사실이다. 박 대통령이 이런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결단을 내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시 폐지가 과연 능사인지는 신중을 기해 판단해 봐야겠다.

현재 공식적으론 행시가 없다. 3년 전 민경채 제도를 도입하면서 행시란 이름을 ‘5급공채’로 바꿨다. 60여년 이어온 행시의 맥을 끊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일반에선 여전히 행시라 불린다. 정부는 매년 행시로 300명가량, 민경채로 100명가량 뽑고 있다.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을 일부 민간에서 충원하는 개방형 공모제는 민경채와 별도다.

행시 출신 공무원의 순혈주의를 깨고 민간 전문가가 공직에 많이 진입하도록 시험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은 행정학 교수들이 요구하는 정답이다. 하지만 공직사회 현장에서는 꼭 정답이라 하기 어렵다. 민경채에 유능한 전문가가 지원하지 않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공직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실력 갖춘 민간 경력자가 초봉 월 200여만원인 5급 공무원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박 대통령이 개방형 공모제가 무늬만 공모제라고 비판했지만 이 역시 보수와 무관하지 않다. 업무수행 능력을 갖춘 외부 전문가는 보수가 적어 지원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공무원이 채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민경채나 개방형공모 출신자의 경우 행시 출신에 비해 국가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열정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음미해 볼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재력이나 배경이 없더라도 오직 실력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시험을 하나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는 점이다. 행시는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제도다. 대학을 졸업한 뒤 비싼 학비를 내고 3년을 더 다녀야 판·검사가 될 수 있는 로스쿨제도는 빈곤층에게 그림의 떡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시를 완전 폐지하고 민경채로만 5급 공무원을 충원할 경우 돈 없는 수재가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차단된다. 민간에서 경력을 쌓으려면 석·박사 학위는 기본이고, 다양한 스펙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민경채 과정에 청탁 비리가 개입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뽑기 때문에 고위 공직자나 실세 정치인 등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현대판 음서제(蔭敍制) 부활 가능성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의 민간 전문가 채용 확대는 시대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세월호 파문에 휩쓸려 공무원 채용제도를 졸속으로 바꾸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행시 폐지 문제는 그래서 좀 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