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세월호 참사’ 취재한 日 아사히신문 특파원 히가시오카 도루 기사의 사진

“바다 앞에서 아이들 이름 부르는 가족 보고 가슴 찡”

건국 이래 최악의 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사고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인명구조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해양경찰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선장 등 선원들은 제 살기에 바빠 승객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국가 개조라는 대변혁을 불러온 세월호 사고를 지진 등 잦은 재난을 겪고 있는 일본인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쳤을까. 아사히신문 서울 특파원 히가시오카 도루(東岡徹·40)씨를 만난 이유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바로 팽목항을 찾아가 열흘 남짓 현지 취재를 했다. 고깃배를 직접 구해 세월호 침몰 현장까지 접근한 민완기자다. 현장에서 함께 취재했던 아사히의 이성진 기자도 동석했다.

-사고 현장에서 느낀 점은.

“진도체육관에 게시된 생존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없어 우는 가족의 사진을 찍었는데 옆에 있던 남자분이 사진을 지우라며 때릴 듯이 위협했다. 처음에는 유가족들이 너무나 격앙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팽목항의 처음 분위기는 어떠했나.

“생존자가 있으면 팽목항으로 올 것이란 판단에 따라 그곳에 갔다. 진도체육관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오후 10시쯤 도착했는데 벌써 자원봉사자들이 텐트와 함께 컵라면 등을 제공하고 의료진도 준비돼 있었다. 휴대전화 회사에서는 이미 무료 충전소까지 차려놨더라. 역시 한국은 소문대로 뭐든지 빨리빨리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했다.”

-팽목항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팽목항에서는 사고 선박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가족들이 화물을 내리기 위해 깊숙이 파놓은 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큰 소리로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한숨을 크게 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찡했다. 나도 어린 아들이 둘 있는데 내 아들이 저 배에 있다면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 아팠다. 당시에는 취재도 취재지만 한 사람이라도 구조됐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구조과정을 취재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첫날은 나도 밤을 꼬박 새웠다. 밤 12시쯤 한 어머니가 배 안에 있는 아들로부터 문자가 왔다며 이를 취재진에게 공개했다. 그래서 급하게 기사를 만들어 본사로 보냈는데 경찰은 약간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아이들한테 문자를 받았다고 해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목포에 갔는데 그 문자는 누가 장난으로 보낸 것으로 결론 났다. 엄중한 상황인데 누군가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니 정말 슬펐으며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적으로 마련된 분향소에 많은 조문객이 온 것에 대해서는.

“곳곳에 쓰인 미안합니다란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선장이나 선주의 잘못도 크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사회 분위기를 만든 어른들의 죄책감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고가 난 다음 날 민간인 선박을 하나 구해 세월호 부근까지 접근해 보니 휴대전화 전파 막대기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살아 있다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일본의 경우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조용하다는데.

“두 나라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일본은 슬픔을 조용히 참는 편이다. 2009년 11월 부산 사격장 사고 당시 현장을 보기 위해서 입국한 가족들이 묵었던 호텔이나 시신이 안치되었던 병원에서 문상객을 받았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산 사격장 화재 현장에 도착한 가족들 중 소리 높여 사망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오열하는 이는 한명도 없었으며, 그 중 한 유가족은 평소 사망자가 좋아했다는 캔 맥주를 사서 현장에 설치된 제단에 올려 놓은 뒤 조용히 합장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의 교훈을 고베 시민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데.

“고베에 주재기자로 1년반 일한 적이 있다. 고베 지진 당시 6400여명이 희생됐다. 전후 최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지진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났어도 고베 지진 기사를 계속 쓴 기억이 있다. 일본은 지역판이 발달해 고베 지역에만 배달되는 신문에 거의 매주 지진 기사를 게재했다. 고베 지역에는 아직도 그 사건을 잊지 않고 교훈으로 삼자는 분위기가 있다. 이때 이후 지진 발생에 대비한 매뉴얼이 잘 훈련되고 습득되고 이해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 작은 지진이 발생해도 고베 대지진과 비교해 분석하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내년이 바로 고베 대지진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내년을 앞두고 지금 고베 시민들은 그 재난을 잊지 말자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평상시 재난 훈련을 어떻게 하나.

“고베 대지진 이후에도 니가타 등 여러 곳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그때마다 고베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주민들이 다짐한다. 재해 대응은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가령 발생 장소가 도심인지 아니면 도시 외곽인지, 시간대가 낮인지 밤인지 등의 차이가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사례별로 모아 연구한 매뉴얼이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국민들이 우리 언론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일본은 어떤가.

“아사히신문의 경우 사건 사고 취재 매뉴얼을 계속 검증 중이다. ‘사건·사고에 관한 취재 및 보도방법’에 대해 책으로 나와 있다. 시중에 팔기도 한다. 물론 일반 국민들이 사가는 것은 아니고 언론사를 지망하거나 현역 언론인들이 주로 사가기는 하지만 매뉴얼은 잘 만들어져 있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은 대형 재난사고 발생 시 취재 방안이 상세하게 마련돼 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우리 국민들이 일본을 도와준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 2010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시 같이 공부하던 일본 유학생들과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가슴을 뭉클하게 한 기억이 많다. 모금함을 만들어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몇 만원씩 주는 아주머니는 수도 없이 많았으며 어떤 아저씨들은 지갑을 통째로 주면서 힘내라고 해 정말 기억이 많이 난다. 특히 어떤 젊은이들은 일본어로 힘내라는 글을 직접 써서 주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이 무엇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현재 비록 한·일 관계는 좋지 않지만 슬픔을 겪은 나라에 대해 이웃 국가가 뭔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일 관계가 좋았더라면 많은 지원이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해서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나 서로 힘든 일을 겪었을 때에도 서로 도와 좋은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재난사고 났을 때에도 정부를 잘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와 사고의 차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부임한 지 2개월째라는 히가시오카씨는 일본과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학연수를 통해 우리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지만 세월호 유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구태여 피하는 듯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며 진정으로 슬픔을 공감했으며 두 나라 사이가 정치적으로 좀 더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고베 대지진의 교훈

1995년 1월 17일 리히터 규모 7.3의 강력한 지진이 고베(神戶)시와 아와지(淡路)섬 주변 지역을 강타한 사건. 한신 대지진이라고도 불린다. 6436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었지만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총리는 오전 6시쯤 우연히 NHK방송 뉴스를 보다 처음으로 지진 발생 사실을 확인했다.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해 지진 발생 4시간 후에야 대책본부가 꾸려지고 긴급대책은 다음 날에야 발표됐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우리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내각부에 24시간 정보집약센터를 신설하고 위기관리센터도 24시간 운영체제로 정비했고 10분 내 진도 분포 등을 추계할 지진피해추계시스템(DIS)도 정비했다. 이후 일본은 획기적으로 변해 웬만한 지진이 발생해도 단 한 명의 희생자 없이 견뎌내고 있다. 정부의 무능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 세월호 참사와 꼭 닮았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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