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박종성] 관피아의 裏面 기사의 사진

힌두교에서 동물들의 신으로 군림하는 루드라(Rudra) 신이 있다. 동물들과 함께하면서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파괴하며 인간에게 역병을 옮기기도 하는 위험한 신으로 인식된다. 마을 사람들은 동물들로부터 루드라를 몰아내기 위해 가장 우뚝한 수소 한 마리를 선택하여 그 소를 루드라로 간주하고 기른다고 한다. 이 소를 또한 성스러운 존재로 받들며 찬양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고 하니 그 속성이 특별하다.

그러다가 이 수소를 밤중에 마을 밖 숲 속에서 희생시킴으로써 루드라를 숲과 들판으로 추방하는 효과를 거두고, 종국에는 마을의 안녕을 도모한다고 하는 것이 이 희생제의의 핵심이다.

부정하고 위험한 것을 자신의 내부에 가두어 두는 존재는 그 자체로 부정하다 하겠으나 한편으로 부정한 것을 가두어 두는 그 속성이 신성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한 것임을 보면 신성성의 개념이 부정함을 토대로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월호의 참극 이후 한국사회는 권력을 지닌 집단의 공통적 특권에 분노하고 있다. 이른바 관피아 쇼크가 그것이다. 그런데 관피아의 공통적 특질이 루드라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한국사회에 국민들과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불법적인 것을 그들의 내부에 가두어 두고 지난 시절 고위 관료의 지위를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마치 루드라의 신성함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듯이 국민들로부터 사회 지도층이라는 찬사를 받아야 함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루드라는 집단의 안녕을 위하여 희생되지만 관피아는 영생불멸의 길을 가려 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라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청렴함과 소신으로 한때 국민적 호감을 샀던 총리후보자는 전관예우와 과다 수임료의 덫에 걸려 청문회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낙마했다. 일종의 법피아인 셈이다.

한 사회를 지탱시키는 세 가지 서술명제는 ‘∼해야만 한다’는 명령,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해도 된다’는 허용이다. 이는 그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 관습적이든 법률적이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셋을 무력화시키는 모호한 서술명제가 우리 사회 내에서 질병의 숙주처럼 작동하고 있음을 근자에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관피아식의 권력 집단은 국민들에게 세 가지 서술명제를 강요하면서 그들 스스로는 모호한 서술명제를 삶의 신조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떤 유형의 권력이든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집단들은 공정이니 민주이니 정의이니 하는 텅 빈 큰 그릇을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는 내용물은 무엇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릇에 새겨놓은 그들만의 공정과 민주, 정의가 그 속에 담고자 하는 모든 것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절대적 기표(signifiant)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제대로 체득(體得)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의 제2의 은총이라고 하는 관피아식 구조와 실행 방식이 그들 내부에서 하나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그들만의 내부적 규칙을 은폐하는 것 또한 규칙의 규칙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종의 ‘메타-규칙(meta-rules)’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슈만의 ‘유머레스크’에서 실제로 연주되지는 않지만 악보 상에 ‘눈으로 보는 음악’으로만 존재하는 주선율의 존재, 이른바 ‘내성(inner voice)’이 우리 사회에 질병의 숙주처럼 작동하는 부정적 사례를 우리는 관피아식 시스템을 통해 목도했다. 듣지 못하는 주선율,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주선율로서의 내성이 이른바 ‘죽지 않음(un-dead)과 살아있지 않음(un-live)’ 사이를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좀비(zombie)의 형상처럼 부정적으로 작동하는 무시무시한 불행을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보지 않기만을 바란다.

박종성 방송통신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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