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식물들이 춤추는 곰배령길 기사의 사진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 곰배령(해발 1164m) 가는 숲길에는 봄도, 여름도 늦게 온다. 올해는 좀 다르다. 지난 26일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지금 곰배령에 꽃이 별로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봄꽃은 예년보다 일찍 졌고, 여름 꽃은 아직 안 피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변덕 탓에 제철의 꽃 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속초에서 하룻밤을 자고, 27일 아침 양양을 거쳐 곰배령길로 향했다. 조침령터널을 지나서 진동계곡을 따라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설피마을에 접어들었다. 설피마을은 겨울에 눈이 워낙 많이 내려 설피를 신고 다녀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 낙백한 선비들이 숨어들던 은둔처였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허름한 산간오지였지만 지금은 거의 마을 입구까지 도로가 포장됐고 비포장 구간도 길이 확장됐다.

곰배령생태관리센터부터 강선마을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1.7㎞의 평탄한 길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와 풀들이 많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숲에서 자라는 감자난초는 조그만 황갈색 꽃들이 줄기 끝에 모여서 피어 있다. 꽃봉오리가 열리면 하얀 꽃잎이 드러난다. ‘숲의 요정’이라는 꽃말에 어울리게 녹색 꽃대와 황갈색 꽃, 그리고 하얀 꽃잎술이 조화를 이룬다. 연보라색 졸방제비꽃, 노란 나도양지꽃, 보라색 벌깨덩굴꽃 등이 많이 보인다. 여름을 알리는 샛노란 꽃인 미나리아재비도 활짝 피었다.

계곡 건너편에서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도깨비부채를 발견했다. 도깨비부채는 큰 잎이 부채를 닮았고 그 크기도 사람 손바닥보다 훨씬 더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이 50㎝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 황백색 꽃이 아래에서 위로 차례대로 핀다. 보기 어려운 조릿대 꽃도 보였다. 꽃대가 나와서 진한 보라색 꽃받침 위로 삐죽한 노란 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1년 중 이맘때 약 보름 동안만 핀다.

나무들도 다양하다. 까치박달, 서어나무, 거제수 등 자작나무과 나무, 느릅나무, 난티나무, 다릅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찰피나무, 호랑버들, 돌배나무, 야광나무 등이 고루 섞여 있다. 강릉과 속초, 양양의 해안가는 겨울에도 온난한 해양성 기후대를 형성하지만 설악산과 점봉산의 고산지대는 기온이 낮아 겨울철에 많은 눈이 내린다. 산림청 산하 국립수목원 조용찬 박사는 “한랭 습윤한 기후조건은 온대북부 식물과 온대중부 식물이 공존할 수 있게 만들어 종 다양성 유지를 위한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강선마을∼곰배령 3㎞ 구간은 고목들이 즐비한 본격적인 극상림이다. 관중, 고사리 등 양치식물이 탐방로 주변을 뒤덮었다. 난티나무 열매의 씨앗이 바닥에 온통 널려 있다. 탐방로뿐만 아니라 주변 풀잎 위에까지 거의 무슨 견과류 슬라이스 고명을 뿌려놓은 듯하다. 난티나무 열매는 5∼6월 가장자리가 날개로 된 길이 1.5∼2㎝ 정도의 납작한 타원형 열매가 밝은 갈색으로 여문다. 가운데 위쪽에 씨앗이 들어 있으며, 다 익으면 가까운 곳으로 날아간다. 곳곳에 보이는 층층나무, 들메나무, 느릅나무, 난티나무 고목들은 20∼30m 높이까지 자라 고개를 들어도 잎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잎이 어느 나무 것인지도 헷갈렸다. 다른 산에는 흔한 신갈나무와 소나무는 오히려 드물게 나타났다.

앙증맞은 참꽃마리가 탐방로 옆에 숨어 있다. 연한 남색 꽃이 2∼3개월에 걸쳐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지름이 0.7㎝에 불과해 과연 나비나 벌을 불러 모을 수 있을지 의심이 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그만 개미나 작은 곤충이 드나든다고 한다. 검은색 꽃봉오리가 요강처럼 생긴 요강나물 꽃도 보인다. 흰 광대수염 꽃도 탐방로 내내 자주 눈에 띈다. 꽃잎 밑에 달린 꽃받침 끝이 수염처럼 뾰족하게 나와 광대의 수염을 연상시킨다. 늦봄까지 피어 있는 야생화들이 많이 진 대신 눈개승마, 매발톱, 노란장대 등 6월에 피는 꽃들이 일찍 얼굴을 내밀었다.

곰배령은 강원도 강릉의 선자령, 정선과 태백의 분주령, 금대봉 일대 등과 함께 야생화 트레킹 3대 명소 중 하나다. 곰배령에 서식하는 보호식물은 금강초롱, 한계령풀, 모데미풀, 진부애기나리, 왜솜다리 등 30여종에 이른다. 곰배령 일대를 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한 산림청은 탐방예약제를 통해 하루 탐방객을 300명, 진동리 마을에서 내주는 탐방 허가인원 300명 등 6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인제읍 귀둔리로 향하는 하산 길에 잎 군데군데 흰 페인트를 칠한 듯한 개다래를 만났다. 덩굴식물인 개다래의 일부 잎은 잎면의 절반이나 전부가 흰색으로 물들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이는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것으로 수분이 이뤄지면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간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짜낸 번식의 전략인 셈이다. 산딸나무의 작은 꽃이 눈길을 끌기 위해 커다란 넉장의 포(苞)를 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산딸나무의 꽃차례 지름은 1㎝도 안 된다. 이를 둘러싼 십자가 모양의 노란색 포는 꽃잎처럼 보이지만, 역시 곤충을 불러 모으려는 장치다. 식물들은 동물처럼 이동할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생존과 번식의 전략은 동물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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