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맛있는 e담화] 1. 회장님은 여자를 싫어해 기사의 사진
그래픽=공희정 기자 jjinga0@daum.net
10여년 전 경기도 한 골프장을 지인들과 함께 찾은 A씨. 동료들은 ‘굿샷’을 외쳐댔지만 볼은 100m 겨우 날아가 톡 떨어지고 그린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져 전반 9홀을 어떻게 돌았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늘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후반 라운딩을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늘집의 여직원이 회장님이 밖에서 티샷 준비 중이라며 일행을 막아섰다.

A씨 일행은 회장님 일행이 첫 홀을 벗어난 후에야 후반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웬걸 회장님이 일반인들과 마주칠까봐 일행을 막았을 거라는 A씨 추측은 오산이었다. 나중에 동료로부터 들은 얘기는 달랐다.

회장님이 여자들이 골프장에 보이는 것을 싫어해 여직원이 그늘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헐~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언젠가 며느리들이 골프 치러 왔다가 회장님 눈에 띈 적이 있었다. 회장님은 당장 아들들과 조카들을 호출해 호통을 쳤다. “어디 남자들이 비즈니스하는데 여자들이 알짱거리느냐”는 것이었다.

창업주 때부터 내려온 유교적 가풍에 인화를 최대 덕목으로 삼는 기업 풍토 탓에 이 그룹은 삼촌과 조카가 번갈아가며 경영권을 승계한다.

‘왕자의 난’이나 ‘형제의 난’ 등 다른 그룹들처럼 경영권을 둘러싼 잡음도 없다.

지금은 여러 명의 여성 임원들을 배출하고 여성친화적 기업으로 자리잡았지만 회장님의 여성관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 통계자료를 보니 30대 그룹 184개 상장사의 임원 7628명 중 여성 임원은 131명으로 1.7%에 불과하다. 10대 그룹의 경우 삼성은 임원 2199명 중 여성 임원이 48명으로 2.2%, 현대자동차는 898명 중 0.1%인 1명이다. 그마저 일부 그룹들에선 여성 임원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여성이 사법시험 합격자의 절반을 넘고 114년 만에 여성 은행장이 탄생하는 등 유리천장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기업들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경영자가 여성 인재를 뽑으려고 해도 한국 사회에선 일과 가정을 함께 꾸려가기 힘들어 중도에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많은 것도 원인일 터다.

TV드라마 ‘미생’의 워킹맘 선배가 후배에게 던지는 “사회생활 계속하려면 혼자 살아”라는 말이 워킹맘들 사이에 폭풍 공감을 얻는 이유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육비·교육비를 지원하고 다자녀 가구에 세제혜택을 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독신 가구는 늘어가고 출산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꼴찌도 모자라 전 세계 최하위권이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하는 ‘삼포세대’의 슬픈 현실이다.

청년 취업난과 막대한 사교육비, 불안한 노후 등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문제는 돈을 더 퍼주거나 ‘싱글세’ 같은 세금을 매긴다고 저출산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성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도록 기업문화를 바꿔야 한다.

세계적 인터넷쇼핑몰 이베이 CEO(최고경영자)를 거쳐 HP(휴렛팩커드) CEO로 일하고 있는 멕 휘트먼은 한 때 다국적 컨설팅기업 베인&컴퍼니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녀는 첫 아이를 출산한 뒤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매일 적당한 시간에 귀가해 아이와 시간을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회사가 아주 바쁠 때만 빼고 5시 반이면 퇴근하겠다고 선언했어요. 회사 분위기가 젊고 활동적인데다 아이가 없는 직원들도 많던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은 선택이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나친 의무감에서 해방됨으로써 업무 효율성이 20%는 더 높아졌고 더 많은 자신감을 얻게 됐지요.”

우리나라 대다수 기업에선 꿈같은 얘기다.

‘핑크 파워(여성 경제학·Womenomics)’의 저자인 클레어 십먼과 케이티 케이는 “여성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 곧 회사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여성 경제학의 시작이요, 핑크파워가 불러온 변화의 물결이다.”라고 주장한다.

회장님들이여,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명희 선임기자 mheel@kmib.co.kr

▶블로그 http://blog.naver.com/whgusdn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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