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맛있는 e담화] 5. 대통령은 왜 ‘찌라시’라고 뭉개나 기사의 사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정윤회씨 동향' 관련 문건. 세계일보 캡처
#지난해 말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 정윤회(59)씨와 측근들, 이른바 ‘십상시(十常侍)’ 송년모임이 열렸다.

“김기춘 실장은 최병렬이 VIP(박근혜 대통령)께 추천하여 비서실장이 되었는데 ‘검찰 다잡기’만 끝나면 그만두게 할 예정이다. 시점은 2014년 초·중순으로 잡고 있으며 7인회(친박 원로모임) 원로인 김용환도 최근 김기춘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정보지 및 일부 언론에서 ‘바람잡기’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유포해라.”

“이정현(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근본도 없는 놈이 VIP만 믿고 설치고 있다. VIP의 눈밖에 나기만 하면 한 칼에 날릴 수 있다. 안봉근 비서관이 적당한 건수를 잡고 있다가 때가 되어 내가 이야기하면 VIP께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김덕중 국세청장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 장악력이 부족하다.”

지난 1월 6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 근무 중이던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靑 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 관련 측근(정윤회) 동향’이란 제목의 감찰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김기춘 비서실장 사퇴설이 증권가에 돌았고, 이정현 전 홍보수석이나 김덕중 전 국세청장은 실제 교체됐다.

이 문건에는 정윤회씨가 강원도 홍천 인근에서 은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매달 두 차례씩 상경해 청와대 및 여의도에 포진한 10명의 측근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청와대(BH) 내부상황을 체크하고 의견제시를 했다고 나온다.

또 정윤회씨가 정부 고위관료 인사 및 청와대 내부인력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안봉근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에게 전달하여 시행하도록 하면서 ‘십상시’ 멤버들에게 정보지(속칭 ‘찌라시’) 관련자들을 만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보유포를 지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지난해 작고한 송재관(고 육영수 여사의 사촌동생) 전 어린이회관 관장의 처조카인 김모씨가 “정씨를 만나려면 7억원 정도 준비해야 한다”며 정씨와 친분을 과시한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고 한다.

어디까지 진실일까?

비선 실세 의혹 왜 나오는지 짚어봐야

세계일보가 지난달 28일 박근혜정부의 숨은 실세로 알려진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청와대 문건을 통해 확인됐다는 보도를 한 이후 며칠째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만만회(박지만·이재만·정윤회)’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에 이어 중국 후한 말 13세 영제를 쥐고 흔들었던 10명의 환관을 뜻하는 ‘십상시’까지 등장했다. 막장 사극이 따로 없다.

물밑에선 대통령의 남동생과 실세가 ‘권력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비선 실세 의혹 중심에 선 사람은 박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던 1998년부터 그림자처럼 보좌하면서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을 만났다는 거짓 루머가 돌면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등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씨는 “2007년 물러난 뒤 7년 동안 야인으로 살며 3명의 비서관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지난 4월 이재만 비서관과 연락했다는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폭로가 나오면서 금방 거짓말로 들통났다.

정씨가 승마협회 감사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담당 국·과장 인사에 개입했고 대통령이 직접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고 언급하며 경질 인사를 지시했다는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의 구체적 증언도 나왔다.

이 정도면 최소한 의심해보는 게 맞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찌라시’로 일축하며 이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정윤회씨에 대해선 “이미 오래 전에 내 곁을 떠났고 연락도 끊긴 사람”이라고 했고 청와대 핵심 3인방은 “15년 전부터 내 곁에 있었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왔다. 물의를 일으키거나 잘못한 적이 없다. 이들이 무슨 권력자냐. 일개 내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두둔한다.

그러면서 청와대 감찰 내용이 아닌 문건 유출만 문제 삼는다.

“이번에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도 하고,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 “한 언론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한 후에 여러 곳에서 터무니 없는 얘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등 봉합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묘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감찰 보고서가 새나간 것은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보고서 내용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어떤 곳인가.

청와대로 옮겨가 짐 풀고 일하던 기획재정부 차관보를 검증에서 걸러내 돌려보내고, 대기업들이 은밀하게 행정관들에게 상품권 돌린 것까지 잡아내는 곳 아닌가.

박 대통령은 말 한 마디로 서슬퍼런 청와대 ‘포청천’을 ‘믿거나 말거나’ 식의 찌라시나 양산하는 공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대통령은 검찰 수사 내용을 지켜보자고 했지만 검찰 수사결과는 이미 보나마나다.

정권의 충견인 검찰이 대통령 의중을 모른 척하면서 정씨의 국정개입 의혹을 파헤칠 수 있을까.

국민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의심하고 일개 부처의 과장 인사까지 챙기는 ‘자상한 대통령’에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대통령은 세상 여론에 귀 막고 눈 감고 있다.

오죽했으면 여당의 중진 의원이 “국민의 눈으로 보고 국민의 귀로 들으라”고 충고했을까.

‘각하’라고 추켜세우며 대통령에게 세상 민심을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여당 지도부는 또 뭐하는 사람들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실세는 진돗개”라고 하자 청와대에 있는 진돗개 ‘희망이’와 ‘새롬이’ 가운데 누가 실세냐는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청와대 감찰 보고서 내용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도려내야 한다.

만약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왜 이런 말들이 나오는지 짚어봐야 한다. 호사가들의 단순한 입방아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찌라시’에 3년이나 남은 정권의 발목이 잡혀서야 되겠는가.

이명희 선임기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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