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맛있는 e담화] 6. 우리는 왜 조현아 사건에 공분하나 기사의 사진
2001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하는 ‘최고경영자(CEO) 하계 포럼’이 열린 제주 신라호텔.

개회식까진 3~4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훌쩍 큰 키에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40대 남자가 중문 해수욕장 해변가로 다가서더니 거침 없이 옷을 훌훌 벗고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호젓한 해변가에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 틈을 타 수영을 즐기고 싶었나보다.

국민일보가 석간으로 발행되던 시절이라 오전에 마감을 끝내고 취재차 제주에 일찍 도착했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중 이날 연사로 초청받은 대기업 회장의 몸매를 감상하는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공식 석상에서는 외모만큼이나 멋진 매너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A회장.

그런데 회사 내에서는 직원들에게 육두문자를 날리고, 쪼인트를 까거나 서류 뭉치를 날리는 등 ‘조폭’ 상사로 유명하다.

그 앞에서는 직원들이 모두 벌벌 떨 정도다.

해병대 출신의 B회장.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도 가입해 대외적으로는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사내에서는 이 회장 역시 직원들에게 막말과 폭언을 서슴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재벌 2, 3세’ 특권의식이 항공기 회항 사건 불러


따지고 보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항공기 회항 사건도 이러한 재벌 2, 3세들의 ‘선민(選民)의식’이 낳은 결과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구중궁궐’에서 특별하게 길러지다보니 일반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드물고 특권의식이 몸에 배일 수밖에 없다.

돈 많은 부모 만나 외제 자동차에 실려 부유층 자제들이 모이는 사립초등학교를 다니고, 아프리카 국적을 위조해서라도 국제중이나 국제고·외국어고에 입학하는 게 이들이 밟는 코스다.

국내 중·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외국으로 유학 가서 ‘졸업장’ 갖고 돌아와 20, 30대에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회사에 임원으로 입성한다.

자신의 아이들 역시 로열 패밀리 코스를 밟도록 ‘원정 출산’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파문이 커지자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아직도 ‘내 회사인데 내 직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게 뭐 잘못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겐 수천명 직원들이 그저 자신들 재산의 껌값도 안 되는 월급 몇 푼 받기 위해 주인에게 머리 조아려야 하는 ‘미생’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과 어울릴 기회가 거의 드물고 ‘로열 패밀리’끼리 모이다 보니 저잣거리 서민들의 정서를 알 턱이 없다.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정몽준 새누리당 전 의원의 아들이 세월호 유족들과 관련해 “국민 정서가 굉장히 미개하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가 뭇매를 맞은 것도 일반 국민들과 재벌 2, 3세들의 동떨어진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다른 국가 사례와 달리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이 가서 최대한 수색 노력하겠다는데도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한테 물세례하잖아”라며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이라고 글을 올렸다가 아버지가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나의 불찰”이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역시 “제 여식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것 같다.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왜 조현아 사건에 공분하나, ‘부의 불평등’ 위험수위 다다른 징조다


재벌 2, 3세들의 일탈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올해 말 재계 인사에서는 재벌가 자제들의 초고속 승진이 두드러졌다.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최대주주의 아들 정기선(32)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 수석부사장이 상무보를 건너뛰고 상무로 승진했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양자인 구광모(36) (주)LG 시너지팀 부장이 지난달 27일 상무로 승진했다.

현대중공업은 창사 이래 3조원이 넘는 최악의 적자로 임원 숫자를 30%나 줄이는 등 구조조정 삭풍이 몰아치는데도 대주주 아들을 승진시켜 눈길을 끌었다.

범LG가인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외아들 구본규(35) LS산전 상무도 지난해 이사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상무로 승진했다.

재벌가 3세 중 최연소 임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31) 대한항공 전무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도 입사 6년 만인 2005년 31세 나이로 대한항공 상무보가 됐다.

김요한(32) 서울도시가스 부사장과 이우선(32) 유니온 상무, 이은선(32) 삼천리 이사 등도 젊은 임원군에 든다.

일반 대기업에서 상무로 승진하는 나이는 평균 51.3세, 전무는 54.6세라는 통계와 비교하면 재벌가 자제들의 롤러코스터 승진에 쏠리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단 몇 년 만에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수긍하기도 힘들뿐더러 인생 공부도 제대로 했다고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일 터다.

최근 재계에서는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젊은 재벌 2, 3세들로의 경영권 승계도 한창이다.

헐값에 사들인 삼성SDS 상장에 이어 제일모직이 18일 상장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가 3남매는 수조원대 돈 방석에 앉게 된다.

‘편법 증여’와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대물림은 현대차그룹이나 한진그룹을 비롯한 다른 그룹들도 비슷하다.

토마 피케티의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가설을 명쾌하게 확인시켜준다.

문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일탈에 온 국민이 공분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여러 나라로 확산되고 ‘부의 불평등’이나 ‘양극화 문제’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는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 등도 “소득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성장률이 떨어진다”며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양극화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최대 걸림돌이라는 주장이 자주 나오고 있다.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물려받은 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나갈 것인지, 순식간에 망하게 할 것인지는 오로지 재벌 2, 3세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 1세대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소줏잔을 기울이며 독려했다는 것을 안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이명희 선임기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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