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맛있는 e담화] 9. 주먹질한 회장님 속앓이한 사연은 기사의 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기업인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국민일보DB
‘주먹자랑’하다 감방에 갇힌 A회장.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200시간 명령을 받아 풀려났다.

사건 당시 여론이 악화되면서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던 A회장, 몇 달 뒤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고 경영에 복귀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이 회장, 감옥은 두 번 다시는 못 갈 곳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굽신거리는 수만명의 ‘미생’들을 거느리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호령하다가 1평 남짓한 감방에 갇혀있으려니 ‘없던 울화병’이 생길 만도 하다.

실제로 감옥에 가게 되면 미뤄뒀던 수술 날짜를 잡거나 병을 핑계로 감옥 대신 하루 입원비 100만원이 넘는 병원 VIP병실에서 수감 아닌 수감 생활을 하는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이 특별사면을 받자 정부 부처 오만 군데서 전화가 빗발쳤다.

용건인즉 풀어줬으니 돈 보따리를 풀라는 것이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기업 투자가 절실한데 취임 첫 해에 실적은 내야겠고, 대통령은 몸이 달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수차례 기업들을 달래고 당근을 줬다. 대기업 회장들의 편법 상속이나 비자금사건에 면죄부를 주고 수십년 숙원사업을 풀어줬는데 기업들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으니 배신감이 들 만도 했다.

경제나 기업과 관련된 경제부처들은 물론 국세청과 국가정보원까지 동원돼 “투자금액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경제부처들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찰보다 더 무서운 국세청과 국정원이 나서니 투자금액을 얼마나 내놓아야 할지 이 기업은 난감해했다. 그러다 숫자를 들이밀었더니 ‘너무 적다’고 퇴짜를 맞고 다시 올려야 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친 시기에 이 기업은 신성장동력사업에 ‘통큰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언론에서는 ‘위기 때 회장님의 승부수’니 ‘역발상’이니 호들갑을 떨었지만 시커멓게 타들어간 회장님 속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사업에 햇볕 든다는 소식은 안 들려오고 있다.


기업인 사면 시켜주고 팔목 비튼다고 경제가 살아날까


역대 정권마다 기업은 대통령에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존재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가난한 나라를 함께 일으켜세울 ‘동반자’였고, 어느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기업 생사가 달려있다보니 대선 때면 ‘차떼기’로 선거자금을 갖다바치던 것도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 정치자금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만 상납한 재계 서열 7위의 국제그룹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폭설로 늦는 바람에 1주일 만에 공중분해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대선 후보로 경쟁했던 정주영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이 수난을 겪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재벌 총수들과 칼국수를 먹으면서 투자를 종용했었다. 결과는 은행 빚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한보철강, 진로 등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기치로 ‘빅딜’을 내세워 LG에서 반도체 부문을 빼앗아 현대에 넘겨줬다. 삼성은 기아자동차 인수 꿈을 접어야 했다.

서민 이미지를 내세운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 청와대 인근 삼계탕집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당시 전경련 회장이던 손길승 SK 회장 등을 불러 투자를 부탁했다. 재벌 총수들은 초여름 비좁은 삼계탕집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첫해 기업인들을 대거 사면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시작으로 정몽구 현대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면 혜택을 입었다.

그러면서 투자하라고 다그쳤다. 서민 금융지원을 위해 대기업들에게 ‘미소금융재단’을 설립하거나 출연금을 내라고 했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적 기업들이 직원들을 대량 감원할 때도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 계획을 내놓으라고 했다. 경영환경은 불투명한데 오죽 답답했으면 기업들이 몇 달 뒤 해고할 인턴 숫자까지 끼워넣어 일자리 늘리는 시늉을 했을까.


박 대통령, 대기업과 ‘불가근’에서 ‘불가원’으로 바뀌나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엔 대기업들과 거리 두는 모습을 보였다.

대선 후보시절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을 남용하지 않겠다던 공약도 영향이 있을 터. “돈 있고 힘 있으면 자기가 책임을 안 져도 되고 이런 게 만연된 상황에서는 절대 국민에게 법 지키라고 와닿지 않는다. 사면권은 정말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2012년 7월 16일)

취임 첫해 대기업 세무조사에 나서고 대기업 회장들의 불법 행위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정찰제’ 판결을 깨자 대기업들로부터 원성도 자자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최경환 경제 부총리 취임 이후 수십조원의 재정을 쏟아붓고 금리를 내렸는데도 경제가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자 역대 정권들처럼 ‘U턴’하려 하고 있다.

감방에 있는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대기업 회장들의 ‘주홍 글씨’를 없애주면 투자가 확 늘고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최경환 부총리와 황교안 법무부 장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군불을 때기 시작한데 이어 최근엔 숨죽여 있던 기업인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대한상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두산 회장과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2월 설 명절이나 3·1절을 기점으로 수감 중이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난 기업인들에 대한 가석방 또는 사면이 이뤄질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 회장들을 풀어준다고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은 역대 정권들에서 이미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흘러간 옛 노래’를 읊어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직도 기업들과 뭔가를 주고 받는다는 ‘구시대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경제성을 따져보지 않고 사면을 대가로 투자하는 것은 기업 미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일자 ‘서울의 재벌 집착증’(Seoul’s Chaebol Fixation)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경제 살리기를 이유로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가석방·사면 추진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한국민이 재벌 일가의 특권에 분노하는 가운데 이런 움직임이 있다며 “경제가 필요로 한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고 있다. 한국 사회의 재벌 의존이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면죄부 문화를 낳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2013년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를 비판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제는 재벌의 저주에 걸렸다면서 가석방·사면 조치로 치러야 할 정치적 비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 언론에서 보면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탈세해 주주들과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기업 CEO들이 툭하면 집행유예나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는 상황이 이해가지 않을 것이다.

15억 달러 분식회계로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파산한 에너지기업 엔론 CEO에게 24년4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2013년 6월 법무부의 감형 권고와 변호인의 감형 요청을 받아들여 형량이 14년형으로 줄긴 했지만 엔론의 제프리 스킬링 전 CEO는 여전히 콜로라도주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미국은 2001년 엔론 사태 이후 대기업들의 회계부정을 엄벌하자며 법안 발의를 주도한 상·하원 의원들의 이름을 딴 ‘사베인스-옥슬리법’도 제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의 전철을 밟게 될지, 아니면 ‘유전무죄’ 관행을 깨고 한 단계 성숙한 기업 문화를 만들어낼지 지켜볼 일이다.

이명희 선임기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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