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③ ‘크레디트’에 관하여 기사의 사진
볼사리노
‘옛날’ 영화와 ‘요즘’ 영화의 차이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게 하나 있다. 오프닝 크레딧. 프론트 크레딧이라고도 하는데 영화가 시작될 때 주요 출연진과 제작진을 소개하는 ‘인물 자막’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요즘 영화들에서는 이게 대체로 빠져있다. 제목만 뜨고는 곧바로 영화로 넘어가는 것이다. 영화 팬 입장에서는 상당히 섭섭한 처사다. 옛날 영화를 볼 때 극장의 불이 꺼진 뒤, MGM 같으면 저 유명한 울부짖는 사자 레오 같은 제작사의 친숙한 로고에 이어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제작진의 이름이 줄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앞으로 펼쳐질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한 설렘과 가슴 두근거림 등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시작된 게 1980년대부터 아닌가 싶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출연진의 경우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친절하게도 starring(주연), co-starring(조연), 나아가 신인(featuring)까지 표시해주곤 했다. 그래서 옛날 영화를 인터넷이나 DVD 등으로 볼 때 나중엔 주연급으로 성장하는 배우가 ‘신인’으로 소개되는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거물급 스타들이 공동주연을 하는 경우 누구 이름이 더 비중있게 처리되느냐, 곧 스크린의 앞이나 위에 소개되느냐가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최고의 양대 스타였던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절대 공연하지 않았던 전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처음 함께 출연했던 영화 ‘볼사리노(1970)’가 국내 개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 문제를 놓고 영화팬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두 배우의 팬들이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먼저 나오는 게 맞다고 주장했던 것.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벨몽도의 이름이 스크린의 앞쪽이라 할 수 있는 좌측에, 들롱 이름이 우측에 내걸렸다. 알고 보니 영화의 제작까지 맡은 들롱이 벨몽도를 출연시키기 위해 그런 식으로 양보 한 것이었다나.

이처럼 오프닝 크레딧은 정보 가치 외에 그 나름대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엔딩 크레딧, 또는 클로징 크레딧도 마찬가지. 특히 엔딩 크레딧은 모든 출연진과 제작진은 물론 로케이션 장소나 영화에 사용된 음악 판권 등 온갖 시시콜콜한 내용이 빠짐없이 포함돼있어 골수 영화팬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엔딩 크레딧이 꼭 영화 내용과 관련된 사항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해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거머쥔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는 엔딩 크레딧의 맨 말미에 이런 문구가 뜬다. ‘세르지오와 돈에게 바친다(Dedicated to Sergio and Don)'. 세르지오와 돈은 물론 각각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을 가리킨다.



레오네는 ’황야의 무법자‘ 3부작을 통해, 시겔은 ’더티 해리‘를 통해 무명이었던 이스트우드를 거물 배우로 출세시키면서 연출 수업까지 시켜준 감독들이다. 이제 배우는 물론 감독으로서도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이스트우드가 인생 말년에 접어들어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느낀 소회가 물씬 풍겨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토록 흥미있는 대목이 엔딩 크레딧, 그것도 맨 끝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주연 겸 감독이라 해도 이스트우드 개인의 소회를 적어놓은 글귀니 만큼 쑥스러워서 일부러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배치했는지는 몰라도 영화를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의 첫 부분, 오프닝 크레딧에 들어가 있으면 더 좋을뻔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관례적으로 헌사를 맨 앞에 적어놓는 출판물처럼. 어차피 남들 보라는 헌사 아닌가. 하긴 오프닝 크레딧 자체가 없어지고 있는 마당에 헌사까지 맨 앞에 넣으라는 주문은 아무래도 무리일까.

김상온 프리랜서·영화라이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