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옥씨의 미술 바구니] 2. ‘그림 호텔’을 아시나요? 기사의 사진
서울옥션 직원이 경기도 양주 장흥 수장고에서 그림 상태를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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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안 사요?” “집에 그림 걸 공간이 없네요.”

수도권에서 병원장을 하는 컬렉터 A씨가 제게 짓궂게 묻더군요. 그가 작고한 현대화가의 작품을 옥션에서 2억원에 낙찰 받는 걸 본 적이 있지요. ‘월급쟁이 사는 게 빤한 걸 알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눙치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펀치를 날리더군요.

“에이, 누가 집에 거나요. 수장고에 맡기지. 보고 싶을 때 가 얼마든지 보면 되는데….”

이른바 ‘그림 호텔’에 점당 수천만원에서 수억원하는 그림을 맡긴다는 컬렉터의 세계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15일 메이저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이 운영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미술품 수장고를 찾아갔지요. 금융권의 귀중품 보관 서비스와 비슷하지요. 보석 보다 비싼, 그러면서 더 까탈스런 그림을 맡아주는 곳이지요.



#VIP룸에선 거래도 이뤄져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리니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더군요. 직원이 커다란 엘보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로 복도를 따라 이어진 룸이 보이더군요. ‘A203호실’. 개인열쇠와 함께 별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리는 방입니다. 천장이 3.5m로 유난히 높은 게 맨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가변형 선반에 여러 크기 그림들이 차곡차곡 포장돼 있더군요. 36㎡(11평) 공간을 채운 그림은 얼추 200여점 되어 보였어요. 100호(130×160㎝), 200호(193×259㎝) 대형작품도 적지 않았습니다. 시가로 따지면 수십억∼수백원어치의 그림이 있는 밀실에 들어왔다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군요.

겉포장에 붙은 태그에는 번호, 작가명, 작품명, 크기, 구입 연도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항온·항습(온도 20도, 습도 50% 내외)은 기본이구요. 그러네 사람이 아니라 그림에 온습도를 맞춘 탓인지 약간 한기가 느껴졌답니다. 최신식 하론가스 소화시설도 있더군요. 화재 시 불을 끈 후 약제의 잔재물이 남지 않아 박물관에서 선호하는 소화기이지요.

최신 설비를 갖춘 창고의 개념이 강하다보니,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을 때는 그림을 꺼내 ‘VIP룸’으로 간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며 지인에게 그림 구경을 시켜주는 컬렉터가 있는가하면, 여기서 그림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고 귀띔해주더군요. 서울옥션 김경순 팀장은 “아침에도 고객 한 분이 다녀갔다”고 했습니다. ‘원하면 언제든지’를 강조한 거지요.

장흥 수장고엔 보다 규모가 큰 49㎡(15평), 69㎡(21평)의 수장고가 있답니다. 서울 도심인 인사동(1평과 평창동(6평)에는 좀 작은 수장고를 운영 중입니다. 연간 임대료는 규모별로 연 400만∼2700만원. 월급쟁이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지요.

K옥션은 서울 강남 본사에서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별 공간을 세주는 게 아니라 작품별로 크기에 따라 개당 보관료를 받는다고 하네요.



#어떤 부자 컬렉터들이 맡길까?

이용은 월 단위로 가능하지만 대개 연간으로 빌린다나요. 적지 않은 금액인데도 ‘출혈’을 감수하는 건 집이나 사무실에 걸 수 있는 규모보다 더 많이 산 때문이겠지요. 집안 장식이 아니라 수집이 목적인 거죠. 개인 고객의 경우 미술관 건립을 염두에 두는 경우도 있다고 서울옥션 최윤석 이사는 말하더군요.

제가 아는 그 컬렉터 A씨는 “거실에 걸기엔 너무 큰 100호 이상 대형 그림이나 작품성은 있지만 보고 있으면 우울해지거나 무시무시한 느낌의 그림은 수장고에 맡기게 된다”고 하네요. 개인이 집안에 갖추기 힘든 항온항습이나 보안 시스템도 매력이지요. 지하실이나 베란다에 방치했다가 곰팡이가 슬어 어렵게 복원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봤거든요.

규모가 큰 장흥 수장고는 개인 고객과 기업고객이 각각 절반이라고 합니다. CEO가 미술애호가인 중소기업 뿐 아니라 계절별로 그림을 교체할 필요가 있는 호텔에서도 즐겨 이용한다고 하네요. 수장 공간이 부족한 작은 갤러리도 단골 고객이라나요. 인사동 수장고의 경우 월 단위로 빌릴 수 있는 이점을 살려 지방 출신 화가들이 서울에서 전시할 때 요긴하게 쓰기도 한답니다. 전시기획자들도 빼놓을 수 없지요. 해외에서 빌렸다가 돌려줘야 할 기간이 남아 고민스러울 때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림 호텔, 참 다양한 부류에게 반가운 곳이네요.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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