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⑦ ‘듀크’ 존 웨인 기사의 사진
몇 년 전에 나온 영화 ‘월드 인베이젼-배틀 LA’를 이제서야 보았다. 이 영화를 개봉 당시 보지 않았던 것은 인터넷 등 온갖 매체를 도배하다시피 했던 악평에 지레 질려서였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니 현재에서 아주 가까운 근미래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과 미국 해병대 간의 ‘시가지 전투’를 그린 영화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SF라기보다는 전쟁, 그것도 소규모 부대전투에 관한 영화라고 할 때 그랬다.

단지 일부 평자들이 지적했던 대로 미국·미군 찬가가 두드러졌지만 미국영화가 미국과 미군을 찬양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건다면 한국영화가 한국과 한국군을 찬양하지 않고 비하해야 박수를 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무슨 무슨 골‘ 같이 국군을 폄하하면서 북한 인민군에 더 동정적으로 보이는 ’반(反)국군‘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어쨌든 요점은 그게 아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다. 영화 중간쯤 용감한 행동을 하는 한 군인을 향해 동료 병사가 “존 웨인 흉내를 내지 말라”고 하자 옆에 있던 젊은 병사가 말한다. “존 웨인이 누구야?” 세상에. 아무리 신세대라고 한들 미국 군인이 존 웨인을 모르다니. 아니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다니. 그 정도로 미국에서도 세대가 바뀐 것인가. 반세기 넘게 ‘미국문화의 아이콘’으로 군림해온 존 웨인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존 웨인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다. 그는 배우를 넘어 미국의 가치와 이상, 그리고 애국심과 미국적인 것을 대변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국내외적으로. 평생 수백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감독했다. 텍사스주를 놓고 미국과 멕시코가 맞붙어 싸웠을 때 압도적인 규모의 멕시코군에 저항해 싸우다 전멸한 미국인들을 그린 ‘알라모(1960)’와 반전영화가 난무하던 베트남전 당시 유일하게 베트남전을 지지한 영화 ‘그린베레(1968)’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비밀 해제된 옛 소련 극비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웨인의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극렬한 반공주의 때문에 그를 암살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1975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존 웨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로히토에게 존 웨인은 ‘유황도의 모래(1949)’ 등 수많은 태평양전쟁 영화를 통해 각인된 일본제국군의 ‘적의 상징’이었다.



그렇다고 웨인이 ‘수구 꼴통’은 아니다. 그는 보수파의 거두로서 골수 공화당 지지자였지만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내놓고 지지했으면서도 케네디가 당선되자 “나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 대통령이다. 나는 그가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하기를 바란다”면서 케네디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또 1970년대 중반 파나마운하 문제가 불거지자 미국이 계속해서 운하의 전면적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운하에 대한 파나마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면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민주당 편을 들었다. 그래서 당시 진보파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애비 호프먼 같은 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웨인의 건전한 사고방식과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의 정치적 견해에 관해서는 글쎄, 원시인들도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는 공룡을 조금쯤은 경외하지 않았을까”

그런 존 웨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각별해서 그의 별명은 ‘듀크(공작)’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어릴 때 애견을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데리고 다녀서 그 개의 이름인 듀크를 아예 그의 별명으로 불렀다지만 그보다는 다른 설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즉 과거 미국 연예계에서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에게 왕이나 귀족 칭호를 붙여주는 관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즈계의 경우 가수 겸 피아니스트 냇 콜은 ‘냇 킹(왕) 콜’로,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엘링턴과 윌리엄 베이시는 각각 ‘듀크(공작) 엘링턴’과 ‘카운트(백작) 베이시’로 더 많이 알려졌던 것처럼 할리우드에서는 클라크 게이블에게 ‘킹’, 존 웨인에게 ‘듀크’라는 애칭을 붙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 웨인은 1949년부터 197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매년 최고 흥행수익 배우 10인에 뽑혔다. 이는 그 어떤 배우보다 앞선 기록이었다. 2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인데 이스트우드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우선 이스트우드가 셜리 맥클레인과 1970년작 ‘수녀와 무법자(Two Mules for Sister Sara)'라는 서부극을 찍을 때의 일. 워렌 비티의 누나로서 당시 이스트우드보다 훨씬 더 유명했던 맥클레인은 이스트우드를 평해 “젊은 시절의 존 웨인을 연상시켰다”고 극찬했다. 싸구려 이탈리아 서부극에나 출연하는 그저 그런 배우인줄 알았더니 ‘무려 존 웨인 같더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만년의 웨인이 욕심냈던 배역 가운데 ‘더티 해리(1971)’가 있었다는 점. 더티 해리는 이스트우드를 톱스타로 확고히 만들어준 영화지만 하마터면 관객들은 ‘노인네 더티 해리’를 볼 뻔했다. 영화 제작 당시 웨인의 나이가 63세였기 때문. 결국 웨인의 고령을 이유로 이스트우드에게 해리 형사역이 돌아갔으나 너무 아쉬웠던 그는 더티 해리가 나온 지 3년 뒤 ‘맥Q’라는 영화에 거친 형사로 출연, 소원풀이를 했다.



또 웨인은 해리스 여론조사에서 유일하게 사후에 ‘가장 인기 있는 영화배우 10인’에 꼽혔다. 그는 1979년에 사망한 뒤 15년 만인 1994년에 이 리스트에 포함된 뒤 연속 19년 동안 거기서 빠지지 않았다.

존 웨인은 그 찬란했던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아주 늦은 1969년에야 서부극 ‘진정한 용기(True Grit)’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요즘 일부 평자들은 이 영화를 2010년에 코엔형제가 리메이크한 ’더 브레이브‘에서 존 웨인과 같은 루스터 카그번 역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가 웨인보다 낫다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 웨인과 같은 카리스마는 감히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다. 존 웨인은 키 193센티미터의 거한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맡든 그가 나온다는 그 자체로 화면에 무게와 신뢰와 안도감을 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양키‘하면 존 웨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만큼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여겨져 온 존 웨인, 비록 영화 속에서지만 불학무식한 프랑스 살인청부업자(레옹)조차도 독특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면서 어린 소녀와 알아맞히기 퀴즈놀이를 즐기는 존 웨인을 미국인이 모른다고? 그것도 해병대 병사가? 현실에서도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단순히 세대교체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단절이다. 하긴 요즘 우리 젊은 세대가 ‘한국판 존 웨인’이라 할 김승호나 김희갑을 알까?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