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맛있는 e담화] 15. 오호 통재라! 댓정원, 댓글 판사, 댓글 기자까지 기사의 사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9일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고등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원 전 원장은 징역 3년 실형이 선고돼 법정 구속됐다. 서영희 기자
“내가 가르친 건 형사소송법이 아냐, 검사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검사라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가르쳤어. 정환아. 너는 대한민국 검사야”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펀치’에 나오는 대사다. 박정환(김래원 분) 검사가 자신이 줄 대고 있는 검찰총장 후보를 앉히기 위해 경쟁자인 사법연수원장을 아들 문제로 겁박하자 이 연수원장이 한 말이다.

드라마 속에선 돈과 출세, 명예를 위해 검은 권력들과 손잡고 수사결과를 조작하거나, 상대방을 누르고 올라서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부리는 검찰 세계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이 와중에도 불의에 맞서 약자들을 도우려는 선량한 검사의 모습도 보인다.

어렵게 사법고시를 통과해 검사가 된 이들은 처음에는 “정의로운 검사가 되겠다. 약한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선서를 하면서 힘없고 억울한 약자를 대변하는 신하경(김아중 분) 같은 검사를 롤모델로 삼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는 권력의 힘 앞에 무력해지고 ‘정권의 충견’으로 전락하는 게 대한민국 검사들의 슬픈 현실이다.



판사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진짜 엄마를 찾아내는 ‘솔로몬’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살아있는 권력 앞에 숨죽이고, 죽어있는 권력은 하이애나처럼 물어뜯는 관행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학창시절 츄리닝에 검은 뿔테 안경을 걸치고 다니면서 밤새 사법고시 준비하던 A양이 꿈꾸던 법조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억울한 사람들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법조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시 패스 후 다이어트를 하며 몸무게를 절반이나 줄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고민은 아이를 어떻게 하면 명문학교에 입학시키고, 줄 잘 서서 지방에서 서울 인근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다. 스스로 속물로 전락했다고 자조하면서.

학창시절 미국 CIA 같은 첩보요원을 꿈꾸던 B군. 1990년대 초 민주화투쟁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 복학한 그에겐 남들의 이목이 어떻든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입사하는 게 로망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이 돼 비밀첩보를 다루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국익을 위해 음지에서 일한다’는 현장의 국정원 요원 모습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대학가 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경찰 출입 기자 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시덥잖은 정보보고를 매일 올려야 하는 중압감에 ‘한국판 NSI나 CIA 요원’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국정원을 방문해보면 역대 간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첩보를 어떻게 이용해 간첩을 잡았는지, 요즘의 첨단 IT 기술이 어떻게 국가안위에 도움이 되는지 감탄하게 된다. 먼 거리에서도 백발 백중인 요원들의 사격 실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

하지만 현실 속에선 ‘어리버리한’ 정보과 요원들도 마주치게 된다.

몇 년 전 내근만 20년 하다 나왔다는 한 국정원 직원은 동향을 캐겠다며 몸소 큼지막한 ‘화분’을 들고 보무도 당당히 마음씨 좋은 편집국장 방을 제집 드나들 듯 방문해 모두를 당황케 했다.

음지에서 일하는 국정원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해야 하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사라지고 인터넷 댓글이 판치는 요지경 세상

서울고법은 지난 9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2심 선고공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1심과 달리 유죄를 인정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수십만건의 선거 관련 트위터 글이나 인터넷 댓글을 통해 조직적으로 지난 대선에 ‘불법개입’했다고 본 것이다.

원 전 원장은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 “전 직원이 어쨌든 간에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 그런 자세로 그런 세력들을 끌어내야 된다” “좌파들에 대한 확실한 싸움을 해서 우리나라를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한 해가 되도록 같이 노력하자” 등의 지시를 내렸다. 심리전단 직원들은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 댓글작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안철수 전 대선후보와 관련해 ‘안철수 룸살롱’이 지난 2012년 8월 어느 날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것도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 덕분이었다.

‘아이리스’의 이병헌을, 정우성을 꿈꾸던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 댓글이나 퍼나르고 있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에는 현직 판사가 2008년부터 최근까지 업무 시간에 9500여건의 정치편향 글이나 막말 댓글을 상습적으로 인터넷에 올린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이 판사가 올린 글들을 보면 “박통, 전통 시절에 물고문, 전기고문했던 게 역시 좋았던 듯”, “도끼로 XXX을 쪼개기에도 시간이 아깝다”, “촛불폭도들도 그때 다 때려죽였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등 차마 입에 담기조차 상스럽고 험악한 표현들이 많다.

이튿날에는 KBS 기자가 극우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 회원으로 활동하며 음담패설, 여성비하, 광주 비하,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 등의 내용을 담은 수천건의 글을 올린 사실이 미디어오늘 보도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호 통재라! 국가기관부터 판사, 기자에 이르기까지 ‘댓글나라’가 돼 가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이명희 선임기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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