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옥씨의 미술 바구니] 8. 나폴거리는 저 드레스가 우리 시대의 책가도? 기사의 사진
'책가도'. 19세기,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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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 융성’을 이끈 22대 왕 정조는 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던 정조는 옥좌 뒤에 책가도를 걸어두기 까지 했지요. 화원 시험인 녹취재의 정식 시험과목에는 문방 그림을 출제하기도 했고, 책가도를 화원에게 주문할 때는 그림 속 책의 제목까지 정해 줄 정도였다니, 책가도 사랑이 이만저만 아닌 거지요.

왕이 좋아한 책가도는 시중에 대유행했습니다. 화원들은 경화사족의 집으로 불려 다니며, 병풍에 책거리 그림을 그려주는 일로 바빴을 정도였으니까요. 책가도는 또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의 단골 소재가 됐으니 왕에서부터 서민까지 모두 좋아한 그림인 셈이지요.

책가도는 왜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좋아했을까요. 지식이 상징하는 과거급제, 즉 출세와 성공에 대한 깊은 욕망이 숨어있다고나 할까요.

이런 책가도에 주목한 작가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오상택.(45·서울예술대학교 교수)입니다. 그가 뛰어난 점은 책가도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신 오늘날의 책가도는 뭘까 고민한 것이지요.

그는 명품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도 명품 옷입니다. 그는 2011년부터 ‘옷장(Closet) 시리즈’를 통해 옷이 갖는 권력적 속성에 주목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아이콘으로 옷을 채택한 셈입니다.

그는 옷을 찍어 그냥 전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옷은 그냥 옷이 아니라 ‘욕망하지만 가질 수 없는 권력으로서의 옷’이니까요.

그가 택한 방법은 크기를 ‘약간만’ 키우는 것이지요. 그가 찍은 검은 색 남성 슈트는 110% 확대해 옷장 안에 걸려 있지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으면 가짜 같은 느낌이 든다나요. 또 사진을 캔버스에 입히는 방법을 써 사진이 아닌 회화 같은 느낌을 주지요. 그래서 더욱 다가갈 수 없는 옷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중견작가 오상택을 소개하는 건 이런 데 있습니다. 작가는 모름지기 그 시대를 대표하는 도상을 찾는 사람인데, 그에겐 책가도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읽어내는 통찰과 그걸 우리 시대의 것으로 치환시키는 사유의 능력과 기술적으로 구현해내는 감각이 있거든요.

오상택이 신작 15점을 들고 왔습니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WMC역삼역아트스페이스에서 오상택 개인전 ‘Good(s) For Human’전에서 볼 수 있지요.

전시장은 온통 하얀 옷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치렁치렁 춤을 추듯 걸려 있는 드레스, 날아갈 듯 가벼운 블라우스, 원무를 그리듯 너풀거리는 원피스…. 사랑스럽고 귀여운 혹은 우아한, 뭇 여성들이 동경하는 흰 옷들이 검은색 옷장에 걸려 있습니다.

이 검은색 옷장도 책가도 형식을 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책가도는 서양화의 투시도법과는 달리 여러 시점에서 본 장면을 한 화면에 집어 넣는 ‘확대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옷장 시리즈에서 옷장은 옷걸이봉과 벽체 등 각각의 부분을 따로 찍어 조합했습니다. 가상의 옷장 느낌을 주는 이유이지요.

한 작품이 때로는 2개의 패널, 혹은 3개의 패널에 걸쳐 있기도 합니다. 책가도의 병풍 형식을 슬쩍 빌린 것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이전의 작업에서 보였던 검은 슈트, 검은 드레스는 이번 전시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흰 드레스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전보다 움직임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검은 옷장 속 흰 옷이 주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깊이감, 대상의 과장에서 오는 경외감, 그리고 패널화의 형식 등에서 바로크 예술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석했더니 작가는 그건 의도하지 않은 효과라고 합니다.

남성 슈트가 적당히 부피를 키워 비실재감을 주었다면 이번 여성 옷은 확대 대신 무브먼트(movement·움직임)를 통해 비실재감을 살렸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옷장 속의 옷이 너풀거릴 리는 없지요. 던지기도 하고, 선풍기에 날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찍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예쁜 순간이 찍힌 옷들은, 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며, 과시적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작품이 회화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욕심은 없다. 이 작품을 할 때 캔버스 프린트지가 처음 나와 사용했는데 회화적 효과가 난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어떤가요. 사진작가로서의 긍지가 느껴지는 대답 아닌가요.

샌프란시스코예술대학교 사진과 대학원을 졸업한 오상택은 초기엔 자화상을 찍었습니다. 30대 초반 풍경 작업을 거쳐 30대 중반 이후 옷, 가방, 구두, 찻잔 등 여러 아이템을 놓고 다양한 시도를 거쳤다고 하네요.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전시는 3월 30일까지입니다(02-568-0344).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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