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⑬캐스팅 비사 기사의 사진
영화 관객들이 종종 빠지는 오류 중에 ‘착각’이 있다. 배우와 그 배우가 연기한 극중 인물을 동일시 또는 혼동하는 것이다. 그만큼 배우가 극중 인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 캐스팅만큼 중요한 요소도 없을 듯싶다.

실제로 영화의 인물을 상기할 때 우리는 보통 등장인물로서가 아니라 배우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한니발 렉터’ 하면 식인을 즐기는 잔인한 살인마 의사가 아니라 배우 앤소니 홉킨스를 먼저 떠올리고, ‘매트릭스’의 네오는 ‘기계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라 날렵하고 잘생긴 배우 키아누 리브스부터 생각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특정 역할을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른 배우가 맡았다고 가정할 경우 영화가, 영화의 맛이 어떻게 달라질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우선 생각나는 사례가 ‘벤허’의 찰턴 헤스턴. 헤스턴 하면 유다 벤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역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초 벤허 역은 그때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록 허드슨이나 버트 랭카스터, 아니면 말론 브랜도가 맡을 뻔했다. 세 사람이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헤스턴에게 역할이 돌아갔던 것. 랭카스터나 브랜도라면 몰라도 만일 허드슨이 벤허였다면 ‘벤허’라는 영화는 과연 어땠을까? 허드슨이 주로 눈물짜내기 멜로드라마나 도리스 데이와 짝을 이룬 달달한 성인용 코미디로 이름을 날렸음을 생각하면 상상이 잘 안 된다.



이처럼 다른 배우들이 고사하는 바람에 적역을 떠맡은 운 좋은 배우들이 있다. 1988년부터 시작된 ‘다이하드’ 시리즈로 액션계의 거목으로 떠오른 브루스 윌리스도 그렇다. 당초 그가 맡은 매클레인 형사역으로 액션계의 양대산맥이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 그리고 또 다른 액션스타인 콧수염의 사나이 버트 레이놀즈가 섭외대상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거절했다. 그 덕에 당시 TV극 ‘문라이팅’(한국제목 블루문 특급)으로 겨우 이름을 알리고 있던 윌리스가 새롭게 액션 강자로 떠오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전설이 된 고전 ‘카사블랑카’는 어떤가. 주인공이 험프리 보가트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이었다면? 일설에 따르면 제작자 핼 월리스는 주인공으로 레이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레이건이 보가트 역을 맡았더라도 ‘카사블랑카’가 지금과 같은 영화사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까? 레이건이 정치인 아닌 배우로서는 별 볼 일 없었던 만큼 일찌감치 잊혀진 작품이 됐을 공산이 매우 크다.



캐스팅 비사(秘事)는 이뿐이 아니다. 말론 브랜도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준 ‘대부’의 돈 콜레오네 역을 놓고는 당초 로렌스 올리비에와 어니스트 보그나인, 앤소니 퀸 등이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보그나인과 퀸은 그렇다 쳐도 올리비에 같은 전형적 영국배우, 그것도 셰익스피어 배우에게 이탈리아 갱역을 맡긴다니 이상한 발상이긴 하다. 그만큼 그의 연기력을 중시한 것일 테지만. 하긴 돈 콜레오네의 막내아들 마이클 역을 놓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결국 알 파치노라는 이탈리아계 신인배우가 낙점돼 그 이상 적역도 없었지만 원래 후보로 거론된 것은 워렌 비티,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그리고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다른 이는 그만두고라도 레드포드에게 이탈리아인 역할이라니, 세상에.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맡았어도 괜찮았겠다 싶은 사례도 있다. 조니 뎁의 인기를 치솟게 한 ‘캐리비안의 해적’ 잭 스패로우 선장 역에는 뎁이 여의치 않을 경우의 후보로 짐 캐리가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스패로우 선장에 캐리라 그럴 듯하지 않은가. 인디애나 존스는 당초 해리슨 포드 대신 톰 셀렉이 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셀렉은 TV극 ‘매그넘 PI'에 출연하기 위해 이를 고사했다. 본인으로서는 땅을 칠 일이다. 실제로 한창때의 클라크 게이블을 연상시키던 셀렉의 이미지와 캐릭터로 보았을 때 그가 존스 역을 맡았어도 포드 못지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니발 렉터도 그렇다. 워낙 앤서니 홉킨스가 기막히게 연기하는 바람에 이젠 누가 그 역할을 해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홉킨스가 이 역을 맡은 건 숀 코너리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먼저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코너리나 아이언스가 렉터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최근 TV시리즈물로 만들어지고 있는 ’한니발‘에서 ’007 카지노 로얄‘의 악역 덴마크 출신 성격배우 매즈 미켈센이 렉터역을 맡아 호평을 받고 있는 것처럼 코너리표, 혹은 아이언스표 렉터도 멋졌을 것 같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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