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⑮ 영화제목 훔치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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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빗거리도 없다. 특히 외화의 경우 과거에는 일본산 제목을 그대로 갖다 써서 문제가 되더니 요새는 외국어 그대로 음차(音借)해서, 그것도 멋대로 표기하거나 원제의 일부를 뺀다든지 왜곡해서 엉터리로 지어내는 사례가 많아 지탄을 받곤 한다.

과거의 예 하나. 데이비드 린 감독의 멋진 영화 ‘라이언의 처녀’. 원제는 ‘Ryan's Daughter', 즉 ‘라이언의 딸’이다. 그런데 왜 ‘딸’이 ‘처녀’가 됐을까? 일본어 번역제목 ‘ライアンの娘’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한자 ‘娘’은 일본어로 딸(むすめ)이지만 우리 용법으로는 ‘처녀’ ‘아가씨(낭자)’가 된다. 그런가 하면 희한한 요새 제목으로는 ‘투모로’가 있다. 원제는 ‘The Day After Tomorrow’다. 그걸 한글로 ‘투모로’라고 해놨으니 ‘모레’가 ‘내일’이 된 셈이다.

영화, 특히 외화 제목이 이처럼 말썽이 많은 것은 수입·배급업자들의 무식함이나 무성의함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외신기자들 탓도 종종 있다. 영화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만 보고 영화 기사를 번역하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영화 ‘잘 있거라, 정부(情婦)여’와 미국 영화 ‘푸줏간의 캐시디와 황혼의 꼬마’다. 앞의 것은 중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제목 ‘Farewell, My Concubine'을 다시 우리말로 직역한 것인데 초패왕 항우와 우미인 스토리를 다룬 경극(京劇)을 소재로 한 이 영화의 중국어 원제는 물론 ‘패왕별희(覇王別姬)’였다.



그럼 뒤의 것은 무슨 영화였을까? 그렇다. 우리말을 다시 영어로 ‘대충’ 직역하면 답이 나온다.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다. butch가 푸줏간도 아니고, sundance도 황혼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당시 영화 내용을 모르던 외신기자들이 제목만 가지고 머리를 짜내 만들어낸 우리말 제목이었다. 미국 서부의 전설적 무법자 두 사람의 이름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이 영화에는 국내 개봉 때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그것은 일본산 제목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어서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이같은 엉터리 제목 이야기야 이젠 식상할 정도니 그만 두자.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도용(盜用)이다. 하다하다 이젠 제목 훔치기까지 하는 판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창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쳐보라.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를 그리며. 그러나 고전 명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 제목으로 뜨는 영화는 마거리트 미첼 원작에 빅터 플레밍 감독의 1939년작이 아니라 ‘김주호 감독, 차태현 주연의 2012년작 시대극 코미디’다. 어떻게 그따위 영화에 그 엄청난 고전과 똑같은 제목을 붙일 생각을 했을까.



하긴 1956년에 더글러스 서크 감독이 만든 록 허드슨, 로렌 바콜 주연 ‘Written on the Wind'가 국내 개봉할 때 ’바람과 함께 지다‘라는 제목이 붙었으니 그때부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명세 덕을 보려는 인간들이 있었고 보면 썩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제목을 통째로 갖다 쓰지 않을 정도의 ‘양식’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다’를 ‘지다’로 바꾸는 식으로 살짝 변형하려는 시도조차 아예 하지 않는다.

이뿐이 아니다. 최근에는 ‘영화 차이나타운’을 치면 1974년에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한 잭 니콜슨 주연의 걸작 느와르가 아니라 ‘한준희 감독, 김혜수 주연’의 한국영화 소개로 도배가 된다. 또 영화는 아니지만 TV 드라마도 한몫 거든다. 제임스 딘의 명작 ‘자이언트’는 SBS, ‘에덴의 동쪽’은 MBC 드라마 제목이다. 딘을 기억하는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하에 있는 딘마저 통탄할 노릇이다. 그래도 걸작 소리를 듣는 영화의 제목을 도용함으로써 원작의 이미지를 그토록 망가뜨려도 되는 건가.



하기는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러브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 감독은 1996년에 영화 ‘피크닉’을 만들었다. 윌리엄 인지 희곡을 원작으로 멜로드라마의 거장 조슈아 로건이 연출하고 ‘골든 보이’ 윌리엄 홀든의 남성적 매력과 킴 노박의 뇌쇄적인 아름다움, 수잔 스트라스버그의 풋풋한 귀여움이 돋보인 1955년작을 생각하고 인터넷을 검색했다면 큰 오산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맨 이와이의 ‘피크닉’ 뿐이니까.

작품이 발표된 지가 오래돼서 저작권 시효가 소멸되는 바람에 멋대로 도용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명색이 ‘예술 한다’는 사람들이 고전과 걸작 반열에 오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남의 유명 저작물 제목을 함부로 훔쳐 쓴대서야 말이 안 된다. 제발이지 그런 몰염치, 파렴치한 짓은 그만 두라.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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