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옥씨의 미술바구니] 12. 구구팔팔 노화가의  귀거래사 기사의 사진
김병기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 작업실에서 마지막 사인만 남은, 국내에서 그린 첫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선의 화가’라고 규정한 그는 부산의 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사이로 언뜻 비치는 바다를 죽죽 내리 그은 검은 선으로 추상화했다. 카키색 재킷에 카키색 스카프를 맬 줄 아는 영원한 ‘댄디’이기도 하다. 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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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맞으신 거야? 네댓 시간을 저렇게 열강을 하시니….”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 앞의 한 카페로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합석을 하게 됐습니다. 안면이 있는 윤범모 가천대 교수(미술평론가), 이흥재 전 전북도립미술관장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더군요. 그 분의 귀국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고 해요. 두 시간 남짓 지나 자리를 파하는데, 윤 교수가 혀를 내두르며 그렇게 말했어요. 평양에서의 유년시절 기억에서 현대미술사까지, 연도 하나하나 막힘이 없었습니다. ‘미술사의 산증인, 미술사의 백과사전’이라고나 할까요.

김병기 선생님. 그가 돌아왔습니다. 1916년생. 우리나이로 100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도쿄에서 서양화를 배운 김찬영입니다. 평양 갑부 집안 출신인 그도 서양화가가 됐지요. 이중섭(1916∼1956),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이, 1930년대 후반 일본 유학시절과 한국전쟁 이후 혼돈의 공간에서 교유했던 동년배들입니다.



#49세, 상파울루비엔날레에 갔다가 홀연 미국으로



경력의 절정에 있던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던 그는 귀국하지 않고 미국 뉴욕주의 한적한 동네(사라토가)에 홀연히 남았습니다. 미술계에서 ‘증발’했던 그를 ‘발견’한 이가 윤 교수였지요. 1985년 미국을 여행하다 인근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다고요. 그렇게 해서 윤 교수의 주선으로 1986년 서울 가나화랑(가나아트갤러리 전신)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21년 만에 화가로서의 건재함을 한국사회에 알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2일∼올 3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감각의 분할’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연말 잠시 귀국했던 그는 4월초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사실, 지난해 전시 때문에 그를 인터뷰를 했을 때 “내년 4월에 다시 올 예정”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반신반의했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미국이 아니라 이제 죽기 전에 한국을 그리고 싶어서라구요. 수개월이 될지, 좀더 길어질지 모르는 그의 체류는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후원했습니다.

전날 가나아트에 마련된 작업실을 찾았을 때 첫 작품이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힘차게 내리 그은 선에선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귀국 후 그는 피난시절을 보냈던 부산을 다녀왔다고 해요. 헐벗었던 그곳에는 마천루가 즐비했고 수직의 고층빌딩 사이로 언뜻 비치는 바다에서 한국의 역동성을 봤습니다. 그 벅찬 감동을 추상과 구상이 혼재된 형상으로 표현한 유화였습니다.

“나는 추상을 하지만 한번도 형상을 떠난 적이 없어요. 세잔이 그랬지요. 한번도 자연을 떠난 적이 없지만 거기서 추상을 봤습니다.”

49세에 떠났던 내 땅에 50년 만에 돌아와 그리는 감회가 어떨까요. 그는 “서양서 이것저것 다 해보았다.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한반도만이 가지는 동양성의 깊이를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 내 친구들 국민화가 됐지만 내 절반도 못살아



미국행을 택했던 당시, 김병기 선생은 미술계에서 잘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화가이기도 했지만 평론가에 서울대 강사,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사,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까지 지냈지요. 아버지는 골동품 수집가로도 유명했습니다.

“6·25전쟁 때 서울 아버지 집이 폭격을 맞아 그 많던 골동품이 폭삭 날아가 버렸어요. 몇 점 만 건졌어도 파리 유학을 갈 수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정릉의 무허가 토막집에 사는 신세가 됐습니다. 미국행은 “이념의 틈바구니, 생활고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에 택한 출구가 아니었을까요.

‘9988’(99세까지 팔팔하게 사는 것)이 범인(凡人)의 로망이라면 그는 그 로망의 한 가운데 살고 있다.

“나이, 나이 하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 그릴 수 있다는 겁니다. 내 친구들(이중섭, 박수근 등)이 국민화가가 됐지만 내 절반도 못살았어요. 다 40대에 죽었어요. 그 나이에 안보이던 게 지금 보여요. 그래서 왔어요.”

이중섭은 그에게 각별합니다. 평양에서 소학교 6년 내내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유학시절 이중섭이 일본인들과 파티를 할 때 겁도 없이 한국어로 민족주의적인 노래를 불렀다는 에피소드도 전했습니다.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 만경창파 흐르는 물에∼.” 이중섭이 부르는 노래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었다고요. 노랫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놀랍지 않은가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 시신으로 안치된 이중섭을 처음 발견해 미술계에 알리고 장례를 주선한 이도 그였습니다. “중섭이는 소만 그렸어. 한국 사람의 의식 속에는 소가 하나의 민족적 상징이야. 묵묵히 밭을 가는….”



# 99세 현역…중국 일본서 잇달아 전시



김병기 선생은 지난달 일본 가마쿠라미술관에서 1930년대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강의를 하러 다녀왔습니다.

“80년 전 얘기를 60년 동안 쓰지 않은 일본말로 감히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되더라고요. 나 자신도 놀라웠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던 것 같아요.”

건강비결도 자신은 연줄에 매달린 연이며, 그걸 조종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작업 때문에 인근 이호재 회장 자택에서 일시 기거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아주 긍정적이신 분 같다. 새벽 2시까지 미술사 책을 읽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몇 달 후면 소원했던 한국국적이 나온답니다. 이중국적이 되는 것이지요.

“너무 제 이익만 찾는 사람 같아 미안하지만, 진정으로 한국 사람이 돼 죽고 싶어요.”

한국에서 그린 작품은 내년 4월 백수연 즈음해 전시할 계획이랍니다. 올 하반기에 베이징, 내년 초에는 도쿄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도 이보다 더 바쁘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지 않은가요.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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