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사도’, 유아인의 떳떳한 담백함 기사의 사진
영화 ‘사도’가 개봉 일주일 만에 누적 관객수 200만을 돌파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관람하셨을 텐데요. 극 중 사도세자 역을 맡은 유아인의 연기, 어떻게 보셨나요? 아직 젊은 배우라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유아인은 이 영화에서 가히 ‘인생 연기’를 펼쳤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다른 배역을 맡았을 때는 간혹 특유의 풍부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번만은 다릅니다. 유아인은 사도세자를 너무나도 담백하게 소화했습니다.

사실 사도세자는 유인촌부터 김대명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맡았던 역할입니다. 이미 닳고 닳은 소재란 뜻이죠.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다’. 영조에서 사도세자, 정조까지 3대를 잇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 변주는 없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노론과의 정쟁에 희생된 비운의 왕자라는 사관과 이를 부각시키는 연출이 반복됐죠. 최근 KBS 2TV ‘붉은 달’ 정도가 주목할 만한 상상력을 보여줬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에서는 이 같은 정치적 갈등보다는 부자간의 불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사도세자는 손에 닿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다 광기에 사로잡히는 인물입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터라 누군가에게 기대본 시간도 적죠. 거기다 아내인 혜경궁(문근영 분)은 언제나 남편보다 아들을 우선합니다. 왕가의 다른 인물들처럼 무던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성격인가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학문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감수성 충만한 예술인의 기질을 타고났습니다. 그런 사도세자에게 구중 궁궐은 더욱 큰 족쇄였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지니고 있지만 발버둥조차 마음대로 칠 수 없는 신분의 사도세자. 그간 항상 어딘가 결핍돼 있는 인물을 훌륭히 연기해 냈던 배우 유아인에게 이만큼 적격인 역할이 또 있을까요? 동그란 이목구비가 아직 덜 자란 소년의 느낌을 주지만, 그래서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 더욱 형형히 반짝입니다. 유아인이 수많은 작품 속에서 보여줬던 반항적 모습들은 표적을 잃은 채 허공으로 쏘아진 화살처럼 애처롭습니다. 그에게 결핍된 것은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의 감정이었기 때문이죠. ‘성균관 스캔들’의 문재신도, ‘밀회’의 이선재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종대도 그랬습니다.

특히 사극에서는 그의 장점이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현대물에서는 다소 과잉돼 보일 수도 있는 유아인의 매운 독기를 사극이라는 장르가 중화시키는 느낌입니다. 이를테면 그를 ‘천만 배우’로 만들어 준 ‘베테랑’의 조태오도 ‘사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격지심을 품고 사는 인물입니다. 이를 악물고 턱을 떨며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던 조태오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에서 유아인이 보여준 광기는 넘치지 않아서 되레 처연하고 또 측은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 관 뚜껑을 열어젖힌 유아인의 눈에 애초부터 노기가 서려있었다면 그는 그저 흔한 신경증 환자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자결하라며 칼을 던지는 아버지 앞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을 때나 옥추경을 읊으며 약해진 심신을 위로하던 순간, 후궁인 어머니의 회갑연을 왕비의 예로 치를 적에도 그의 광기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기실 광인 연기는 고성을 빽빽 지르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아인의 사도는 그런 행동의 기저에 결핍이 깔려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과한 동작도, 표정도, 대사도 없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사도세자를 유아인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감정의 장력은 팽팽히 유지됩니다.

‘사도’에서 유아인은 사도세자라는 배역 하나를 맡았지만, 이는 아들을 질투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기도 하며 구조 자체를 불만스러워하는 반항아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유아인은 각기 다른 ‘부족함’들이 뭉쳐진 인물, 사도세자 그 자체로 분했습니다. 유아인이 사도세자를 잘 만난 것일까요, 사도세자가 유아인을 잘 만난 것일까요? 결론은 ‘둘 다’겠죠.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한숨처럼 토해내던 사도세자의 탄식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유아인은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맡았네요. 장희빈을 다룬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이어 ‘사도’에도 출연하더니 이번에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종 이방원으로 변신합니다. 또 다시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겠군요. 그 와중에도 유아인이 다시금 보여줄 떳떳한 담백함이 기대됩니다.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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