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왜 상실되는가? 삶의 충격으로 손상된 내면은 기억의 역사로 혈전된다. 기억의 역사는 삶의 기록이다. 내면의 충격은 삶의 현재성도 상실시킨다. 연극 극단 <코끼리 만보>의 ‘먼 데서 오는 여자’(작 배삼식, 연출 김동현, 게릴라극장 9.18~10.4) 는 한 노부부의 삶을 통해 내면에 침재되어 있는 기억을 세운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성장 통을 끌어안고 숨 가쁘게 뛰고 걸어온 아버지, 어머니 삶의 역사이며, 오늘날로 이어지는 질긴 비극의 삶이다.

작가는 전쟁직후부터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변화의 삶 한 복판에 선다. 쫓기듯 살아온 한 부부부의 삶을 무대로 올려놓는다. 기억은 행복함으로 때로는 상처가 깊게 박힌 채 살아온 내면의 절망으로 교차된다. 기억의 먼지는 내면에 박재된다. 삶을 들추어내는 시간여행은 힘겹다.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거리며 한 여인의 삶의 내면을 차분하게 그려내는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기억이 상실된 채 살아가는 한 노년의 여자(미순)의 삶과 상실된 기억을 회복시키려는 남편과의 대화로 극을 이끈다. 상실된 기억의 틈으로 올라오는 인간의 내면을 두 배우가 무대로 올려놓는다. 2인극은 이대연·이연규 두 배우의 노련하고 간결한 감정의 속도를 따라 강렬한 생명력으로 기억은 응집된다.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두 배우의 노련함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는 제목처럼, 노부부의 과거 기억으로부터 걸으며 현재의 삶으로 끌어당긴다. 여자(이연규)는 기억이 상실되어 있다. 여자의 삶에 기억의 통로는 꺼져 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기억의 불빛은 온도를 내며 걸어온 삶을 밝힌다. 행복했던 과거와 가슴에서 꺼내놓지 못한 삶의 사연들이 파편적으로 꺼내진다. 기억의 상자들은 손상된 역사에 퍼즐을 맞추고 삶의 모양은 현재로 이식된다.

무대공간은 소박하다. 공원이다. 무대 뒤편으로 단풍나무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는 벤치가 놓여져 있다. 무대 앞 쪽으로는 두 사람의 기억을 비추는 가로등이 대화를 비출 뿐이다. 남자(이대연)는 자전거 앞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휠체어를 닦으며 상실된 기억의 창고를 열기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에서 들려오는 삶의 소리들은 강렬한 역사로, 내면의 상처로 겹겹이 둘러싸여진다. 남편도 기억의 저장 공간을 열어간다. 남편 존재도 상실해 버린 여자다. 극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관객은 기억의 역사에 저장되어 있는 삶의 소리들을 듣기 시작한다.

기억의 역사는 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를 거쳐 현재로 되돌린다. 삶 흔적의 기억이자 현재로 이어지는 죽음의 기억이다. 남편의 월남파병,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근로, 파독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기억들이 교차된다. 서사의 가볍지 않음은 ‘대구지하철 참사’로 딸 민영이의 죽음의 기억을 불러 세운다. 여자가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은 “단풍나무 벤치, 그리고 잔디밭.. 가로등 쪽으로 여섯 걸음”이다. 여섯 걸음의 끝은, 딸 민영이 유해가 스며있는 공간이다. 발자국 끝에는 서른 두 사람의 유해가 더 누워있다. 삶의 기억은 전쟁직후 부터 현재로 통로를 연결한다. 기억을 상실시킨 사회적 충격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딸의 유해를 공원에 묻을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성에 강한 사회적 시선을 투영한다. 삶의 절망성에 부딪치는 것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사회의 벽이다.

죽음의 기억, 끝나지 않은 치유

삶의 기억은 여자의 삶에서 치유되지 못한 채 잠겨있다. 과거 삶을 들추어내는 기억의 속도는 (대구 집, 보육원, 상의용사의 죽음, 동생을 버린 상처, 식모살이, 10만원을 훔친 사연, 청계천 시장 미싱시다 시절, 파독간호사의 꿈, 남편과의 만남, 작약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을 나열하면서 굳어진 내면은 상처와 행복함으로 교차된다. 교차되는 서사의 방향에 ‘죽음의 기억과 비극성’이라는 교차로를 설정한다. 동생과 미순 과의 질긴 악연의 끈을 연장시킨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비극성에 치유되지 않는 ‘죽음의 기억’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

관객은 극이 마지막으로 향할 때쯤 ‘먼 데서 오는 여자’의 의미를 눈치 챈다. 기억의 상실성이 딸 미연이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원인이었다는 것과 상실된 기억만큼 사회적 ‘죽음의 기억’도 우리사회에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죽음의 기억을 회복시키기 위해 ‘대구’라는 삶의 배경을 그려 넣는다. 대구의 한 대학에 합격 한 딸(민영), 과거의 기억, 보육원, 남동생과의 기억, 아버지가 군복을 수선하면서 살았던 삶의 골목길에 삶에 흔적을 올려놓으면서 ‘죽음의 기억, 끝나지 않은 치유’를 연장한다. 죽음의 기억은 어린 시절 ‘상의용사’ 죽음을 목격한 것으로 잔재되어 있다. 한 사람의 비참한 죽음에도 사회적시선의 냉소와 내면의 두려움은 마루 밑 처마에 숨어 엄마를 기다리며 겹겹이 쌓아올린 두려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상실의 기억은 ‘가로등 방향으로 여섯 발자국’을 온전하게 기억해내는 것처럼, 상실되고 실종된 기억의 역사를 우리사회가 회복시켜야 하는 발자국이다. 남자는 대사에서 “살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뛰어. 재수 없는 놈들이 죽는 거야. 살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뛰어. 살고 싶으면 뛰어, 도망쳐! 달아나!”처럼 세월호를 비롯해 199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는 대형 참사의 죽음의 비극성을 소급적용한다. 성장 통을 겪으면서 숨 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은 압축 성장을 이루었다. 성장의 현실 틈으로 갈라져 내리는 우울한 사회적 죽음의 기억은 삶의 통증이다.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대형 참사에 비극의 종점은 기억을 회복하고 치유 될 때 가능하다. 통증과 아픈 상처가 가슴의 기억으로 멀어질 때 사회적 죽음에 대한 책임성은 소멸된 기억만큼 회복 될 수 없다. ‘말끔하게 치유되지 못한 채 오늘 날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강한 여운을 남기는 연극이다. 노련한 두 배우는 차분하게 삶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고, 연출은 기억의 숨통을 간결하게 오늘날로 이어 붙인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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