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님, 저 죽어요. 문 열지 마세요.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5분만요.”

지난 3월 7일 안모(46·여)씨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 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에게 그는 이렇게 하소연하며 7시간이나 버텼다. 처음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더니 나중엔 죽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경찰은 경악했다. 8평 좁은 방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음식 쓰레기부터 속옷과 온갖 잡동사니가 산을 이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볼품없었고 한동안 씻지 않은 듯 냄새도 풍겼다. 1.5ℓ 페트병에는 소변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그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안씨는 SNS에서 ‘클레오 안’이란 이름을 가진 ‘미모의 국제자산관리사’로 행세했다. 회계사, 대학교수, 대기업 임원 등에게 온라인으로 접근해 2억원을 가로챘다. 일면식도 없이 메신저와 전화만을 통해 피해자들을 속였다.

그런데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보였다. 저런 방에서 저렇게 사는 걸 이미 들켰는데도 계속 자신이 ‘대단한 미모’를 가졌으며 실제 ‘국제자산관리사’라는 투로 행동했다. 담당 형사에게도 “좋은 투자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이에 투입된 경찰 프로파일러는 안씨를 조사한 뒤 ‘리플리증후군’이란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인격장애를 말한다. 자신이 정말 ‘미모의 클레오 안’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 비자금 관리조직 ‘창’

안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온라인에서 ‘창’이란 조직의 일원으로 행세했다. 청와대 직속 비자금 관리기구라고 했다. 40대 스위스 국적자이며 서울 강남에 살고 고위층과 ‘특급 정보’를 나누고 있다고 소개했다.

재력가들에게 SNS로 접근할 때는 사진을 여러 장 보냈다. 자기 집이라며 보낸 40평대 아파트 사진은 거실에 대리석이 깔리고 안방에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아름답고 늘씬했는데, 일본의 한 연예인 사진이었다.

안씨는 재력가들에게 “‘창’은 ‘창고’의 약자인데, 일제시대 일본인이 국내에 두고 간 자금과 역대 정권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하는 곳”이라고 했다. “엄청난 보물과 현금, 금괴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능수능란하고 확신에 찬 말투로 꾸준히 메시지를 보냈다. 기업 재무제표를 분석해 보내주거나 강남권에서 떠도는 투자 정보를 조합해 알려주며 신뢰를 쌓았다. “몽골 광산 투자” “러시아 원유 사업”에 자금이 필요하다며 돈을 끌어 모았다.

안씨에게는 김모(59)씨 등 공범이 여럿 있었다. 김씨는 2012년 사업가 A씨(56)에게 자신을 ‘창' 관리인이라고 소개하며 접근해 “금괴 60개를 대신 매입해주겠다”면서 32억여원을 가로챈 인물이다. 안씨는 역시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이들과 ‘재력가 풀’을 공유하고 협조체계를 유지하며 타깃을 정해 공략했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리플리증후군

서울 송파경찰서는 29일 김씨 등 안씨의 공범 2명을 추가로 검거해 구속하고 이들을 도운 1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피해자 14명에게 37억원을 가로챈 혐의다. 안씨가 공범 사기꾼들과 다른 점은 자신의 투자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거였다.

전북의 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안씨는 졸업 후 서울 강남에서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8년간 수학을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자산분석에 흥미를 느껴 관련 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관심은 범행으로 이어졌다. 2010년 “미국 JP 모건 관계자”라며 사기행각을 벌여 7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2년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프로파일러 조사 결과, 안씨는 어릴 적 강남 대형 아파트에 살 만큼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는데 한 순간에 가세가 기울었다. 두 언니에 비해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였던 그는 남자친구들에게 잇따라 배신당했다. 그 충격에 미모의 여성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경쟁사회에서 도태됐다는 열등감 때문에 가상인물에 자신을 투과시키는 리플리증후군을 보였다. 열등감과 도태 불안감의 표출로 나타난 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저장강박’이다. 집 안을 가득 메운 쓰레기와 모아둔 소변도 그렇게 해석된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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