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곽경근 선임기자


소녀 심은경(22)과는 이제 작별을 고해야겠다. 이 배우, 어느덧 숙녀가 되어 나타났다. 세차게 흔들리며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이제 활짝 꽃을 피워낼 준비를 끝마쳤다.

영화 ‘널 기다리며’는 그 첫걸음이었다. 작품을 선택한 이유부터 간단명료했다.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장르였어요. 제 단면 하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성공적으로 도전을 마친 심은경의 표정은 홀가분했다.

‘널 기다리며’의 희주는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아버지를 죽인 연쇄살인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15년을 기다린 소녀, 그 속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한 카페서 만난 심은경은 “희주를 이해하는 게 어렵고 혼란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공감하기가 어려웠어요. 대체 어떤 의미로 이런 대사를 하는 걸까 고민이 많이 됐죠.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현장에서 받는 느낌을 그대로 표출하는 거였어요. 그 상황 자체만 생각하면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머릿속에서 많은 걸 지우고 찍은 작품이에요.”

이번 작품은 촬영 때부터 유독 걱정이 많았다. 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몰라 불안했다. 헌데 막상 영화를 선보이고 나니 “그냥 마음이 털썩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왜 그런 걸 의식하고 살았을까 싶더라고요. 어쨌든 나는 희주를 이렇게 그려냈고, 이제는 나의 범주가 아닌데…. 어떤 평가를 듣든 담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이제는 괜찮을 거 같다는.”

KBS 2TV ‘내일도 칸타빌레’(2014)가 남긴 트라우마였다. 심은경에게 첫 연기력 논란을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 ‘써니’(2011)와 ‘수상한 그녀’(2014)를 연달아 흥행시킨 직후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어렵사리 이 얘기를 꺼냈는데 심은경은 너무도 담담했다. 그는 “칸타빌레는 저 스스로도 연기적으로 실망을 많이 한 작품”이라며 “그러나 제가 원해서 한 것이기에 결코 후회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당시에는 ‘계속 연기를 하는 게 맞나’ 의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연기할 때만큼은 행복한데 거기서 벗어나면 많이 힘들었어요. ‘난 열심히 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지?’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그러다 문득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언제부턴가 내 진심을 보여주기보다 그냥 연기를 잘하려고만 해서 생긴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전작의 연이은 성공이 자못 부담으로 다가온 걸까. 심은경은 지체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작품이 감사하게도 너무 잘 됐어요. 근데 한편으로는 저를 성공이라는 것에 옭아매게 한 것 같아요. 그건 순간 지나가는 거고, 내가 스스로 (중심을 잡고) 서있는 게 가장 중요한 건데…. 그땐 많이 어렸죠. 그런 걸 생각하기엔 분명 판단력이 부족했어요. 성장통이었죠.”

이제는 많이 이겨낸 것 같다는 얘기를 건네자 심은경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 시기를 겪으며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살았구나.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내가 행복한지가 중요한 건데. 연기도 결국 행복하려고 하는 건데. 왜 지금 난 행복하지 않은 거지? 그건 뭔가 잘못돼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이렇게 하는 건 아니구나.”

그가 찾은 해답은 결국 연기였다. 좌절해서 주저앉기보다 더 힘차게 부딪혔다. 일단 본인이 하고 싶던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갔다. 그러다보니 올해 무려 세 편 개봉이 몰렸다. ‘널 기다리며’ 이후 ‘조작된 도시’와 ‘궁합’을 내놓는다. 목소리 출연작 두 편이 더 있다.

“일부러 뭐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웃음). 저는 딱 하나예요. 연기해보고 싶어서. 그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이 작품을 하면 내가 돋보일까?’ 이런 생각은 진실하게 연기에 다가가는 데 방해가 되더라고요.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해야 관객들에게도 진실로 와 닿을 거라 생각해요.”



소녀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러웠다”는 그가 이제 먼저 손을 내밀고 고민을 나누는 법을 알게 됐다. “그냥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지금 인터뷰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여러분 저는 많이 행복하고요. 저희 영화 열심히 찍었으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그렇게 (영혼 없이) 말할 수 있어요. 근데 그건 제가 아닌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 심정이.”

흔들림 없이 얘기하는 심은경의 눈빛을 바라보다 순간 울컥했다. 그의 진솔함이 놀라웠고, 그 단호함이 부러웠다. 훌쩍 자라 홀로 우뚝 선 그가 참 대견했다. 정작 심은경은 “이제 막 서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직 걸음마를 떼지도 않았다”며 해맑게 웃었지만.

“저는 그래요. 그냥 연기가 하고 싶어요. 작품마다 제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그거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뿐이에요.”

진지한 그의 고백에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로 대신한 무언의 응원이 온전히 전해졌기를.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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