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옥씨의 미술 바구니] 14. 20세기 겸재 정선 ... 변관식 40주기전 기사의 사진
'촌락풍일'(1957)의 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모를 심는 농부, 새참 이고 오는 아낙을 등장시켜 산수화가 정겹게 다가온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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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수묵화엔 확실히 야인적인 기질이 보입니다. 신경질적인 만큼 꼬장꼬장한 붓질, 그러면서도 뜨거운 에너지가 화폭의 전편에 흐르지요. 고흐의 유화가 꿈틀거리는 서양의 터치라면 그의 산수는 꿈틀대는 동양의 붓질이라고나 할까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근대화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지사형 수묵화가’ 소정 변관식(1899∼1976) 얘기입니다. 그는 ‘금강산의 화가’로도 통합니다. ‘외금강 삼선암 추색(秋色)’ ‘금강산 옥류천’ 등 대표작이 그러하지요. 그가 그린 금강산은 수려하다기보다는 누구말대로 ‘골기(骨氣’가 느껴집니다. 한마디로 남성적이면서 반항적이지요. 갈필로 먹을 켜켜이 쌓고(적묵법), 뻗치듯 점을 찍어 선이 툭툭 끊기듯 이어지는데(파선법), 산하가 피돌기를 하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집니다.

변관식 40주기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생애 마지막 22년을 살았던 서울 성북 지역에 위치한 성북구립미술관에서랍니다. 일명 ‘아리랑고개’ 인근에 위치했던 자신의 집을 변관식은 ‘돈암산방’이라고 불렀지요. 이곳이 금강산 그림을 비롯한 실경산수의 산실이 됐습니다.

변관식은 안중식, 김규진과 함께 개화기 3대 화가로 꼽혔던 조석진의 외손자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아끼는 외손자가 ‘환쟁이’가 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관립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 입학시켰답니다. 하지만 화가의 길을 걷겠다는 외손자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변관식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이끈 서화교육기관인 서화협회에서 훗날 스타화가가 된 이상범, 김은호 등과 함께 수학했지요. 일본 유학도 다녀왔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던 조선미술전람회 등 제도권 미술을 거부하며 야인의 길을 걸었지요. 외로웠을 겁니다.

1937년 이후엔 서울을 떠나 금강산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 사생을 했습니다. 그때 다진 근간이 1954년부터 살았던 돈암산방 시절에 만개한 것입니다. 18세기 화가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의 정신을 20세기에 구현한 화가이지요. 정선은 조선의 산수를 그리면서도 중국식으로 그리고 중국식 복장을 한 사람을 등장시켰던 그전까지의 산수화를 배격하고 우리식 산수를 그렸지요. 직접 본 산세를 특유의 북북 내리그은 선으로 그렸고, 갓쓴 조선 사람이 등장했답니다.

변관식도 한국의 산하를 누비면서 겸재의 정신을 떠올렸을 겁니다. 우리 땅에 대한 변관식의 애정은 곡진해 ‘도화도’ 등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그림을 그릴 때도 기와집과 도포자락 선비를 넣었습니다. 그런 그림들, 재밌습니다.

그가 담은 건 수려하고 장엄한 명산뿐 아닙니다. 주변의 평범한 야산과 논밭까지 화폭에 담는 등 산수화의 파격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풍경 속에는 서민들의 모습이 풍속화처럼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도포 입고 지팡이 짚은 채 걸어가는 노인은 거의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그의 아이콘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정자에서 쉬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멀리 개울 건너 논에서는 함께 모여 모를 심는 농부들, 새참을 나르는 아낙네가 있습니다. 부분 부분은 풍속화로서도 손색이 없습니다.

주변의 풍경을 기록하는 화가의 자세는 그의 드로잉 작품이 증거 합니다. 축대 위에 집들이 즐비한 돈암동 특유의 주택가 풍경, 자택 안 펌프 주변에서 설거지 하는 여인들, 야외에 놀러 나온 노인들 등 일상의 평범한 모습에 눈길을 줍니다. 그가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인 1000원. 5월 22일까지입니다(02-6925-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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